톨스토이 일대기

ETC 2008. 3. 13. 23:17

 용감한 자기 희생정신
 
 1855년 4월 톨스토이는 <<12월의 세바스또뽈>>이라는 작품을 잡지 <동시대인>의 편집자 네끄라소프에게 보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포위된 마을의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내어 주민과 군인들의 용감한 자기 희생 정신을 전하였고 읽는 사람들에게는 작은 애국심을 호소하였다. 이 작품은 <동시대인> 6월 호에 게재되어 크게 호평을 얻었다.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알렉산드르2세도 황후가 권해준 이 책을 읽고 진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연달아 7월에<5월의 세바스또뽈>을 완성 시키는데, 전쟁을 출세의 수단으로 삼는 귀족 사관들의 기만과 불성실을 폭로한 이 작품은 검열에 걸려 다시 쓰도록 명령 받았다. 세바스또뽈 시리즈의 마지막인 <1855년 8월의 세바스또뽈>>은 12월에 완성되어 이듬해 1월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톨스토이의 이름으로 낸 첫 작품이었다. 이 이야기는 군인의 의무를 주제로 삼은 것임에도 톨스토이는 인간의 내면 심리로까지 파고들어가 다루고 있다. 앞서 발표한 두 작품에서 보여준 교훈적인 느낌이나 격앙된 감정은 사라지고, 등장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감정이 그야말로 완벽하게 묘사 되어 있다. 전투가 한창이던 4월13일 톨스토이의 일기를 보면’ 여전히 제4진지에 있다. 갈수록 이곳이 마음에 든다. 끊임없이 위험이 존재한다는 게 매력이다. 게다가 함께 생활하고 있는 병사나, 수부 또 전쟁 그 자체를 관찰하는 것은 실로 너무 흥미롭다. 이 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세바스또뽈 공방전은 중요한 마라호프 고지가 8월 25일 연합군의 손에 넘어가면서 전투는 매듭지어졌다. 이날 밤 러시아 군은 남아있던 요새를 모두 파괴한 뒤 남은 함정을 이끌고 북으로 후퇴했다.
 
 
 문단으로 나아가다
 
 세바스또뽈을 적에게 내주면서 톨스토이는 전령으로 뻬쩨르부르그에 파견되었다. 지옥같이 처참한 전장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군인으로, 또 <유년시절>및 <세바스또뽈 이야기>의 작가로, 그는 곧 문단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뚜르게네프는 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고,네끄라소프는 <동시대인>지와관련된 수많은 문인들을 소개해 주었다. 27세의 청년 작가는 곤짜로프, 오스뜨로보스키, 페뜨, 빠나에프 등의 유명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6년만에 수도로 돌아온 톨스토이는 더 이상 예전의 시골 대학생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성 작가들은, 문단에서 정해진 규율이나 살롱에서의 매너도 알지 못한 채 마음 내키는 대로 발연하는 톨스토이를 경원시하였다. 그런데다 그마저도 6년전이나 마찬가지로 집시 여자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데 열을 올리거나 도박으로 날을 밝혔다.
 다음해 1856년 3월, 알렉산드르 2세는 굴욕적인 크림 전쟁의 종결을 알리는 선언문을 발표한 직후 모스크바의 귀족들을 모아놓고 농노제도를 폐지한다는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황제는 군사 기술이나 병기의 열세를 가져온 근본 원인이기도 한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 극복은 농노제도의 청산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깨달았다. 또 민중들의 봉기에 의해 이를 폐지하기보다는 지도층에서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톨스토이도 자기 농노를 해방할 방법을 궁리하였다. 그는 자유주의적인 농노 해방론자로 알려진 까베린을 만나서 유상 토지를 딸려주어 노예를 해방하는 방안을 세웠다. 또한 정부의 농노 해방사업의 추진자가 된 니꼴라이 밀류틴도 찾아가서 많은 지식도 쌓았다. 수도에서 반 년쯤 머문 뒤 1856년 5월에 톨스토이는 다시 고향 마을 야스나야 뽈랴나로 되돌아왔다.
 
 유럽 여행
 
 톨스토이는 1856년 1월 바로 손위 드미뜨리 형의 죽음을 알았다. 이 불행한 형의 자취를 그는 나중에<안나 까레니나>에서 니꼴라이 레빈의 형태로 묘사하게 된다. 3월에 군을 퇴직하기로 결심하고 상부에 의사를 밝혔으나 11월에야 간신히 허가가 나왔다. 그 해 5월부터 해외여행을 떠나는 이듬해 1월까지 톨스토이는 약 반년 이상을 야스나야 뽈랴나에서 지낸다. 뻬쩨르부르그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는 도저히 농노 해방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따짜냐 숙모와 말다툼을 한 뒤, 곧 자기의 농노들을 불러 모아 이 자리에서 자유를 줄 생각이라고 알렸다. 그리하여 종래의 부역 대신 3년 간 부부 한 쌍 당 매년 은으로 36루블어치를 징수하되 그 이후에는 토지가 완전히 농민 소유가 되게 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놀랍게도 농노들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그들은 이제 곧 황제가 대관식에서 칙령을 발표할 것이고, 자기들에게는 토지를 분배히여 해방시킬 것이라는 소문을 철저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이때만 해도 아직 농민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음해 1월에 그는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떠났다. 파리에서는 난생 처음 사형집행 현장을 목격했다. 그는 이때 평생토록 잊혀지지 않을 큰 충격을 받았다. 뒷날 그가 일체의 살생을 부정하는 사상을 지니게 되는 데는 이 체험이 하나의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역사가 드리지닌과 스위스 루쩨른에 갔을 때 단편<루쩨른>에서도 나왔던 아떤 일화가 잇다. 톨스토이가 머문 호텔 앞에서 어떤 초라한 기타 연주자가 노래를 불렀는데, 부유한 숙박객들은 노래는 실컷 듣고도 누구 하나 돈을 던져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화가 난 톨스토이는 기타 연주자를 호텔 별실로 초대해 밤새 술을 마셨다.
 
 교사 톨스토이
 
톨스토이는 이전부터 교육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있었다. 군대에서는 가끔 부하들이 가족에게 보낼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문맹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도나우 파견군의 일원으로 부까레스뜨에 있었던 1854년 당시, 톨스토이는 동료 장교와 뜻을 모아 병사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에서 교재 정리를 어느 정도 하였다. 그러나 크림 전쟁이 일어나면서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나, 군대를 제대한 지금 톨스토이는 이 계획을 재검토 했다. 유럽 여행의 목적에는 훌륭한 선생을 한 명 사귀어서 가르침을 받자는 뜻도 들어 있었다. 슈뜨뜨가르뜨에 체제하던 7월11일 일기에 ‘고향에서 가까운 마을에 학교를 세우거나 이런 활동을 하고자 하는 생각이 내 머리속에서 상당히 뚜렷하게 떠오른다. 중요한 것은 변함없이 계속해야 한다는 시실이다.’라고 적는다.
 게르쩬을 비롯한 많은 러시아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톨스토이도 서유럽 사회의 속물 근성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보니 순박한 고향 농민들이 떠올랐고 그들을 교육시킬 필요가 없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 집에서 방 한 칸을 교실처럼 꾸며 마을 사람들과 꼬마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859년 초가을이었다. 당시 러시아에는 아직 농민의 자녀를 위한 무료 학교가 없었다. 기껏해야 마을의 신부가 돈을 받고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는 게 고작이었다. 톨스토이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든 극복해 보려고 ‘국민교육협회’설립을 제안했다. 또 러시아보다 진보된 다른 나라의 실상을 관찰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유럽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해방된 농노를 위하여
 알렉산드르 2세는 1861년 2월 19알 농노해방령에 서명하고 3월 5일 이를 공표했다. 2천만이 넘는 러시아 농노들은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톨스토이는 선언문을 가져와 찬찬히 읽어 보았지만 농민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 뿐이었으므로 도대체 누구를 위한 선언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이 해방령에 의해 러시아 농민들은 인격적으로는 무상으로 자유를 얻었으나 문제는 토지였다. 지금껏 농민들 사이에는 전통적으로 ‘우리들은 영주님 소유지만 토지는 우리들 것이다’는 사고가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해방령은 영주에게 농지의 3분지1을 확보할 권리를 인정하였다. 게다가 농민에게 양도된 토지의 가격은 시가보다 훨씬 높았고, 이를 연 6부 이자로49년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장기할부로 매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주와 농민의 이해를 조절하기 위하여 정부는 ‘조정관’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러시아로 돌아간 톨스토이는 이 조정관을 맡아서 농민이 지금보다 훨씬 나쁜 땅으로 배정이 되거나 속아서 토지를 잃게 되는 사태에 항의했다. 또 해방령 공포 뒤 영주가 농민을 채찍으로 때린다거나 무상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사태에 대해서도 배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활동은 근처 지주 귀족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지사에게 톨스토이의 파면을 진정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른 조정관을 부추켜서 톨스토이가 조정한 사례들을 무효로 만들었다. 화가 난 톨스토이는 결국 1862년 2월 뚤라의 농사조정위원회 앞으로 편지를 보내 호소하지만, 지주귀족동맹의 단체행동은 그를 마침내 조정관에서 사임하도록 만들었다. 이 경험에서 톨스토이는 공무원들의 비열함과 정치 및 행정의 무의미함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실감했다.
 
 
 소삐야와의 결혼
 
조정관을 사임한 톨스토이는 몸이 쇠약해져 의사의 권유를 좇아 사마라(현 끄이비셰프)의 초원에 마유 (馬乳) 치료를 하러 떠났다. 이 의사는 베르스 라고 하는 크레믈린 궁전의 시의로, 톨스토이는 그의 아내 류보피와는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였다. 베르스 부처에게는 딸이 셋 있었다. 장녀 리자는 키가 크고 아름다운 처녀 였지만 어딘지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 동생 소삐야는 장밋빛 뺨에 갈색 눈을 한 활발한 처녀로 집안일과 아이들을 돌보길 좋아했다. 톨스토이가 사마라에서 돌아와 얼마 안 되었을 때 베르스 부인이 세 딸을 데리고 톨스토이의 집을 찾아왔다. 베르스 집안은 그 무렵 톨스토이의 집에서 50킬로쯤 되는 조부의 영지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고 갈 생각이었으나 톨스토이의 집에는 침대가 하나 모자랐다. 그래서 톨스토이가 커다란 안락의자를 꺼내오자 소냐(소삐야)는 그것을 곧 자기 침대로 택했다. 톨스토이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시트를 깔아주었고 소냐는 그런 배려가 무척 친밀하게 느껴졌다. 저녁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두 사람은 발코니에 나가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며칠 뒤 톨스토이는 그녀들과 함께 베르스 집안의 조부 영지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톨스토이는 <안나 까레니나>에 적혀 있는 것처럼 카드 상자를 앞에 두고 소냐와 단어의 첫머리를 이어가는 놀이를 하였다. 톨스토이는 이 여름 매일 밤마다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베르스 집안의 별장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소냐의 명명일(命名日) 에 맞추어 편지로 청혼을 했다. 큰딸에게 청혼해 주기를 희망했던 아버지는 처음에는 이들의 결혼을 반대했으나 끝내는 승낙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그로부터 1주일 뒤인 9월 23일 크레믈린에서 거행되었다. 신랑은 34세, 신부는 18세였다.
달콤한 행복
톨스토이와 소삐야의 부부생활은 결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으로 가득한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18살 어린 아내로서는 너무도 개성적이고 까다로운 성격의 톨스토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였고, 가끔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건전한 상식과 풍부한 감정을 지닌 소삐야는 남편에게 늘 성실한 아내였다. 그녀는 남편을 도와 농장의 수입을 늘리도록 애썼고, 작품을 열심히 정서 하면서 그의 창작활동을 도왔다. 그녀가 처음 정서한 작품은 <뽈리끄시까>로, 1863년 3월<러시아 보도> 제2호에 발표되었다. 이 잡지의 제1호에 톨스토이는 <꼬자끄>를 발표하여 크게 호평을 얻었는데 이런 일화가 있다. 전년 1월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톨스토이는 또다시 버릇이 도져서 당구에서 1000루블이라는 거금을 잃었다. 그는 마침 이만한 돈은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러시아 보도>지의 편집자로 있는 까뜨꼬프와 상의하여 <꼬자끄>를 게재하기로 하였고 선불조로 그 돈을 마련했다. 톨스토이는 1852년에 이미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3부에 이르는 방대한 구상을 바탕으로 몇 번이나 손을 보면서 계속 이어나가던 중이었다. 그래서 아직 미완성인 채로 성급하게 발표할 약속을 했다고 뒤늦게 후회를 하면서 고료를 되돌려 줄 테니 연재를 중지하고 싶다고 부탁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작품이 발표되자마자 톨스토이의 작가로서의 명성은 단숨에 높아 갔다. <꼬자끄>는 톨스토이의 까프까즈 시절의 체험을 그대로 살려 청년 귀족 오레닌과 꼬자끄의 딸 마리아나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그린 작품이었다.
 
 
불멸의 거작 <전쟁과 평화>
 
톨스토이가 처음 <전쟁과 평화>를 구상한 것은 1856년이었다. 그 뒤 1860년 가을에 톨스토이는 이 소설의 집필에 들어갔으나 1825년의 반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폴레옹의 1813년 러시아 원정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안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까브리스뜨의 대부분이 나폴레옹을 상대로 한 ‘조국전쟁’에 종군하였고, 종군중에 그들 눈으로 직접 서유럽의 진보된 사회를 보고 낙후된 조국을 개혁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국전쟁’에 대한 사료를 모으던 중 1805년까지 한층 더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1805년에서 12년까지를 1부, 1825년 데까브리스뜨의 반란을 제2부, 1856년 시베리아에서 돌아오기까지를 제3부로 하는 장편을 구상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구상만으로 끝났고, 1878년에서 79년 걸쳐 제3부의 첫5장만 쓰고 결구 미완성인 채로 끝나고 말았다. 톨스토이는 제1부를 완성하는데 자그마치 6년이나 걸렸다. 그동안 3며의 아들과 딸 하나를 얻었다. 소삐야는 창작에 몰두하는 남편을 위하여 7번이나 원고를 정서했다. 이 소설 첫머리는 1865년 <러시아 보도>에 <1805년>이라는표제를 달고 발표되었다. 그러나1867년 가을 그는 제목을 <전쟁과 평화>로 고치고 싶어했다. 이것은 쁘르동의 저작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추측된다. 이 작품은 장편소설이라기보다는 웅대한 서사시로 불러야 할 것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러시아를 구성하고 있는 두 계급?즉 귀족과 민중을 묘사하였는데, 로스또프 가문과 보르꼰스키 가문은 톨스토이의 친가와 외가로 집안을 그대로 모델로 했다.
 
교육활동 사회활동
 
<전쟁과 평화>를 완성한 1869년부터 톨스토이는 또다시 열성적으로 교육활동에 들어갔다. 그는 꼬박 3년 이상 누구나 읽기 쉬운 교과서를 만들기에 골몰하였고 그 자료를 위해 온갖 궁리를 다했다. 교과서에는 러시아의 민요나 속담 외에도 외국의 이야기를 많이 넣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그리스어도 공부했다. 또, 수학과 물리학의문제도 고심해서 만들어냈고 천문학 부분에서는 밤을 새워 별을 관찰했다. 그리하여 1872년 드디어 <초등독본>이 출판되었다. 여기에는 삽화가 들어간 러시아어와 자연과학 외에, 가르치는 사람들을 위한 자세한 교수법도 함께 실렸다. 게다가 명료하고 간결한 문체로 씌여 있는 문장도, 작가 톨스토이가 아니면 좀처럼 만들기 힘든 그런 근사한 교재였다. 그는 이 교과서를 만들어 다시금 마을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아내뿐 아니라 8살 된 장남 세르게이와 7살짜리 따쨔나까지 나서서 도와주었다. 이렇게 교육에 몰두하고 그리스어를 배우느라 다시 건강을 해친 톨스토이는 가족과 함께 예전에 마유 (馬乳) 치료법으로 효과를 본 사마라로 갔다. 그러나 거기서 톨스토이가 본 것은 3년이나 계속괸 기근에 신음하는 농민이었다. 이 마을 농민들은 하나같이 먹을게 없어 그날그날 가까스로 연명하고 있었다. 이들의 궁핍한 실상을 목격한 톨스토이는 바로 펜을 뽑아 <모든 신문 발행인에게>라는 제목의 공개서한을 발표함과 동시에, 황후가 부디 이 기근을 가엾게 여겨주시길 호소했다.
농민의 처참한 실상을 전한 톨스토이의 편지는 러시아 전역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황후의 금일봉을 비롯해 188만 루블이 넘는 구원금이 모였다. 이것이 톨스토이의 첫 사회활동이었다.
 
<안나 까레니나>를 구상하며
 
<초등독본>이 출판된 지 2년이 지난1874년 톨스토이는 네끄라소프가 편집하던 <조국의 기록>에 <국민교육론> 을 발표했다. 이 논설에서 러시아의 현 초등교육을 비판하면서 참교육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교사들이 민중 속으로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듬해 톨스토이는 <새 초등독본>을 출판했다. 이 독본은 전의 것보다 페이지도 적고 가격도 싸서 날개 돋친듯 팔렸다. 이밖에도 어린이를 위한 4편의 독본을 썼다. 한편,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가 완성될 무렵부터 다음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1870년 초엽에 그는 어떤 상류부인을 주인공으로, 그녀의 부정을 죄가 아닌 불행한 운명으로 다루는 소설을 계획중이라고 아내에게 털어 놓았다. 그러나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이 작품은 첫머리만 17번이나 치고 나서야 1873년 겨우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우연한 두 사건이 배경에 있었다. 하나는 아스나야 뽈랴나 부근에 사는 지주 부인이 남편과 가정교사 사이를 질투하여 야센끼 역에서 철도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마냥 평화롭게만 지내온 마을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톨스토이는 이 소문을 듣자마자 야센끼로 달려가 부검에 참석했다. 전에 파리에서 단두대 처형 광경을 보았을 때처럼 톨스토이는 이번에도 여러 날 을 한 마디 하지 않고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두 번째 우연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873년에 일어났다. 톨스토이는 병상에 누운 따쨔나 숙모의 머리맡에서 푸시킨의 <베르낀 이야기>를 발견하고 아무 생각 없이 처음 몇 페이지를 들척였는데 이때 문득 어떤 생각이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고 나서야 드디어 지금까지 몇 번이나 고치고 또 고치던 소설 <안나 까레니나>의 말머리를 그날 밤 쓸 수 있었다.
 
 
토스토예프스키의 절찬
 
소설 <안나 까레니나>는 1875년부터 77년에 걸쳐 <러시아 보도>에 발표되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 4년 이상의 세월을 쏟아 넣었다.
 
 여자 주인공 안나는 사랑하는 우론스끼 백작을 위해 자식과 남편을 버린다. 그리고 우론스끼와의 사이에서도 여자아이가 태오나나, 안나는 두고 온 아들 세이로자가 자꾸 눈에 밟힌다. 두 사람은 잠시 외국으로 나갔다가 돌아온다. 귀국하기 무섭게 사교계가 할퀸 손톱자국은 안나를 상처투성이로 만든다, 한편 우론스끼는 이 아름다운 연인에게 서서이 싫증을 내고 안나는 마침내 철도 자살을 택한다. 이런 비련과 함께 청년 지주 레빈과 공작의 딸 끼띠의 결혼에 이르는 연애가 본 줄거리와 병행되어 묘사된다.
이 두 연애사건을 통해 톨스토이는 ‘사랑은 무엇이며 도덕은 또 어떤 것일까’하는 문제를 제시하고는 있지만, 결코 세상 사람들이 안나를 비난하거나 재판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이 소설의 제목에 붙이는 글로 ‘복수는 나만 할 수 있는 권리로, 결코 남에게 양보할 수 없다’고 하는 말을 적어 두었는데,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인간에게는 본디부터 타인을 비난할 권리 따위는 있을 수 없고 오로지 신만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더 나아가, ‘인생이란 무엇이며 신앙은 또 무엇일까’하는 문제도 제시하는데 2년 뒤에 나올 <참회록>에서 그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안나 까레니나>에 대한 비평의 대부분은 이런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짧은 생각 탓이었다. 편집장 까뜨꼬프는 터키전쟁에 대한 레빈의 무관심한 태도를 비난하였고 이 때문에 톨스토이와 사이가 틀어질 뻔하였다. 일부 귀족들은 이 작품에서 보수적인 요소를 찾아내고는 크게 기뻐하였으나 한편 진보적인 사람들은 그런 점을 공격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도스또예프스키는 이 작품의 가치를 인정하고 <작가의 일기(1877년)>에서 칭찬하는 글을 남겼다.                                    
 
 
내면의 성찰<참회록>
 
1877년,러시아는 또다시 터키와 전쟁을 시작했다. 국내는 슬라브 동포를 구하자는 슬로건 아래 배타적 애국주의가 팽배하였고 톨스토이는 도저히 이런 풍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예전에 크림전쟁에 종군하면서 전쟁의 바로 눈 앞에서 비참함을 체험한 그로서는, 이런 시류에서도 스스로 전쟁의 의미를 물어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전쟁과 평화>의 속편에 해당하는 데까브리스뜨 사건을 쓰기 위해 유형지에서 돌아온 늙은 혁명가를 방문하거나 자료를 모으러 뻬쩨르부르그에 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업은 결국 끝내지 못했다. 정부가 문서관 이용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하는 외형적 문제 외에도 오래전부터 마음을 괴롭히던 내면적인 이유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톨스토이는 가족과 농장, 또 문학에 몰두하는 것이 자기 인생의 참된 목적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1877년부터 79년까지 그는 까루가 지방의 오쁘찌나 수도원이며 끼예프 빠쬬르까야 수도원을 방문해보았지만 그의 갈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배우고 루나의 <예수의 생애>도 읽었다. 또한 성직자뿐 아니라 분리파 교도나 전쟁에 대한 태도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1779년에서 다음해에 걸쳐 <참회록>과 <교의(敎義)신학 비판>을 집필했고, 더욱더 복음서를 연구하여 1881년에는 <4복음서 통합번역>을 저술했다. 그러나 정부가 출판을 허락하지 않아 실지로 간행된 것은 1908년이었다.
 
혁명가들보다 한층 더 높은 이상을 가지소서
 
 1879년 가을, 궁내를 산보하던 황제 알렉산드르2세는 과격파 테러리스트에 의해 저격되었으나 아슬아슬하게 생명은 건졌다. 1874년 여름에 시작된’인민 속으로!’운동이 실패한 뒤, 피격한 젊은이들은 ‘인민의 의지’라는 비밀 단체를 만들어 황제를 비롯한 정부 고관을 암살 함으로써 러시아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1881년 3월 1일 황제는 결국 이 ‘인민의 의지’가 집어던진 폭탄으로 사망했다. 농노를 해방하고, 지방 행정이나 사법제도에 대해서도 근대적인 개혁을 단행한 황제는 위로부터의 개혁에 만족치 못하는 혁명파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전 유럽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톨스토이는 6인의 테러리스트들이 사형선고를 받은 사실을 알고 새로 즉위한 알렉산드르3세에게 곧바로 장문의 편지를 썼다. 마따이 전(傳)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사형 집행을 멈춰달라고 탄원했다. 그는 황제에게 탄원했다기보다 같은 그리스도 교인에게 자기의 참뜻을 이해 시키고자 호소한 것이었다. 그리고 혁명사상과 싸우기 위해서는 혁명가들보다 한층 더 높은 이상을 내걸 필요가 있다고 마지막에 덛붙였다. 그러나 황제는 이런 바람을 저버리고 혁명가들을 극형에 처했다. 톨스토이가 우려했듯이 러시아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반동정책이 강행되었고 혁명가들은 지하로 스며들어 끊임없이 테러를 일으켰다.  톨스토이는 이번 사건으로 주권자가 권력으로 민중을 지배하는 국가제도에 점점 더 회의를 품게 되었고, 모든 국가권력을 부정한 그리스도의 무정부주의자로 기울어갔다.
 
그럼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881년 톨스토이는 자녀들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모스크바로 옮겨갔다. 이 해 겨울 그는 모스크바 주민 조사에 참여하여 빈민가를 샅샅이 돌아다녔다. 한편에서는 돈을 물쓰듯 하는 계층들도 있건만 빈민의 비참한 생활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때 톨스토이는 자선 단체를 만들어 구원금을 모을까 생각했지만 어차피 이런 방법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제대로 해결하려면 무엇보다도 근원적인 사회개혁이 필요하겠지만 그전에 그들이 스스로 삶의 방식을 바꾸려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톨스토이는 이 경험을 토대로 뒷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펴냈다. 전 40장으로 된 이 작품에서 그는  최근 먼저 있었던 주민 조사를 회상하면서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의 원인을 논한 뒤, 지주귀족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부정하면서, 땀 흘려 얻는 빵 한 조각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또 1881년 후반에 그가 알던 뚤라의 관리가 암으로 죽었는데, 이 소식은 톨스토이에게 다시 한 번 죽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할 계기를 주었다. 이리하여 1883년부터 3년 동안에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찌의 죽음>을 완성했다.
어느 고위 관리가 무의미한 인생을 보낸 끝에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다. 냉혹한 처나 위선적인 동료들은 누구 하나 그를 걱정해주지 않았는데 어느 날 평민 게라삼이 아주 사소하나마 유일하게 그를 위로한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고독과 섬뜩할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가 미묘하게 어우러져, 독자들에게 살아가는 의미를 자문하게 하고야 만다. 톨스토이는 1886년에 <밤의 칼>이라는 희곡도 썼으나 농민 생활의 비극을 다룬 이 연극은 1885년까지 상연이 금지되었다.
 
‘끄로이쩨르 소나타’
 
톨스토이와 소삐야의 결혼 생활은 1879년 무렵부터 평온해졌다. 두 사람은 취미와 기호가 크게 달랐음에도 소삐야의 성실한 애정과 헌신에 힘입어 그는 잇달아 대작을 써냈다. 그러나 점차 종교로 빠져들면서, 톨스토이는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소설보다는 교과서나 복음서 집필에 열중하였고, 사회의 부정을 증오한 나머지 자신의 재산마저도 죄악시하자 소삐야는 더 이상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면에서, 소삐야는 지극히 평범하고 성실한 아내였던 것이다.
1884년 6월, 톨스토이는 아내와 심한 말다툼을 벌인 뒤 처음으로 집을 뛰쳐나왔다. 그러나 이때 아내가 임신중이었으므로 생각을 고쳐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불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톨스토이는 1885년부터 <끄로이쩨르 소나타>를 집필했다. 배우 안드레이쁘 블라끄가 그에게 들려준, 질투에 눈이 먼 남편이 여자를 살해한 이야기가 계기였다. 톨스토이가 처음 이 이야기를 듣고 힌트를 얻어 소설을 쓰기 시작햇으나, 이듬해 아주 사소한 우연을 통해 새로운 착상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어느 봄날 저녁에 톨스토이 집에서 개최된 연주회에서 일어났다. 이날 화가 레삔을 비롯한 많은 손님들 앞에서 바이올린 연주자 유리 라소뜨가 톨스토이의 장남 세르게이의 반주로 베토벤의 끄로이쩨르 소나타를 켰다. 이 연주를 듣고 톨스토이는 자기는 소설을 쓸 테니까 레삔은 이 음악을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소설 <끄로이쩨르 소나타>는 완성되었으나 성의 위선과 간통을 다룬 이 작품은 당국에 의해 금지처분을 받았다.
 
굶주린 사람들의 구제를 위하여
 
1891년부터 1892년에 걸쳐 러시아를 덮친 역사상 유래가 드문 기근은 러시아 남부로 퍼져갔다. 이때 굶주림과 콜레라, 발진티푸스로 사망한 사람은 모두 50만에 이른다.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던 9월 말경 톨스토이는 추수할 작물이 없는 지방을 둘러보았다. 명아주 잎을 넣은 빵으로 배고픔을 견디는 많은 사람들을 목격했다. 이 여행은 그에게 <굶주린 사람들의 구제를 위하여><기근에 관한 공개장> 등의 제목으로 알려진 유명한 노문 <기근론>을 집필하기 위한 자료를 제공했다. 11월에는 장녀 따쨔나와 차녀 마리아를 데리고 기근 피해가 가장 심했던 라잔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딸들의 도움을 받아 무료 식당을 개설하는데 이런 식당들이 톨스토이의 감독 아래 1년간 360개로 늘어났고, 하루에16000명의 굶주린 이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현지의 참상을 알리기 위하여 신문사로 논문을 보냈지만 정부에 의해 편찬이 금지 되었다.
이 시기에 발표된 주된 작품에는 <신의 왕국은 그대 가슴에 있나니>가 있다. 이 저작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무정부주의를 극한까지 끌어내고 있다. 그는 정부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경찰과 감옥과 군대를 이용하지만, 무엇보다 국가를 지킨다는 미명 아래 국민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사악하다고 생각했다. 러시아에는 17세기 정교회가 분열한 이래 새로운 전례나 의식을 인정하지 않는 구교도(분리파)가 많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성령을 부정하고 세속적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 까프까즈 지방의 도호불 교도는 국가에 대한 반항과 병역 의무를 거절하면서 1895년에는 무기를 부수는가 하면 정부와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따라서 정부로부터 ‘다루기 힘든 무리’라는 낙인이 찍혀 살던 마을에서도 쫒겨나 결국 캐나다로 집단 이주할 수밖에 없었는데, 톨스토이는 러시아와 미국 사회에 호소하여 많은 보조금을 만들어주었다.
 
체홉과 고리끼
 
톨스토이는 농업과 난민구제 활동에 몰두하면서도 문단에 관심을 잃지 않고 특히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그는 세기말에 나타난 새로운 문학경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체홉과 고리끼 두 사람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그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1889년에 아직 전혀 무명에 불과했던 21살의 고리끼가 톨스토이를 찾아왔다. 톨스토이의 부인은 남편이 지금 병으로 아무도 만날 수 없다고 말한 뒤 이 초라한 청년을 부엌으로 데려가서 커피와 빵을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진짜 병에 걸린 게 아니었다. 소삐야가 내키지 않는 방문객에게 자주 사용하는 수법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3년 후, 고리끼는 다시 톨스토이의 집을 방문했고 이번에는 크게 환영받았다. 톨스토이는 그를 시험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를 물어보고 작품의 평도 해주었다. 물론 톨스토이는 문학적인 재능은 체홉이 더 많다고 평가했다. ‘고리끼에게는 평형감각이 없다’고 골덴와이저에게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체홉에 대해서는 ‘문학적 기교가 최고’라고 칭찬했다. 그느자주 가족과 방문객에게 체홉의 작품을 읽어주었지만 그에게도 미흡한 점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체홉의 작품에 참된 중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치 처녀가 레이스를 짜듯 그렇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련하게 가슴을 저리게 하는 그의 글솜씨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체홉의 희곡만큼은 도무지 톨스토이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니 아저씨>를 보고 나서는 자신이 병문안을 온 체홉에게 사실대로 분명하게 생각을 털어 놓았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세익스피어도 참을 수 없지만 자네 연극은 더 형편없다는 식이긴 했지만, 나중에 체홉은 이 일화를 그의 유머러스한 입담으로 친구에게 전했다고 한다.
 
민중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황제
 
1894년 알렉산드르3세가 죽고 니꼴라이2세가 즉위했다. 13년간에 걸친 알렉산드르3세의 시대는 60년대 농노해방과 관련된 일련의 개혁사업을 폐지하거나 개악한 반동의 세월이었다. 대학의 자치나 지방자치는 제한되고 검열은 강화되는 한편, 유대인과 분리파 교도들은 박해를 받았다. 또한 그 무렵 러시아의 영토였던 폴란드나 핀란드에서도 러시아의 동화정책이 강요되어 소수민족에 대한 압박은 한층 강도를 높여 갔다. 그 무렵 황제 뒤에서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사람은 종무원(宗務院) 장관 뽀베드노스쩨프였다. 그는 러시아에 진정 필요한 것은 국가와 교회의 일체화뿐이며, 입헌주의나 의회정치는 일부 정치적 음모가나 어떤 단체의 이익만 위하는 일이라고 황제를 설득했다. 그는 새 황제 니꼴라이2세에게도 여전히 커다란 영향력을 미쳐서, 새 군주에 대한 민중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깨버리고 반동적 정치를 계속했다. 한편 1891년의 극심한 기근에서 니꼴라이2세가 즉위할 때까지, 러시아의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다. 90년대에는 철도 건설을 비롯하여 공업화가 대규모로 행해지면서 러시아 곳곳에서 노동자 조합이 생겨났는데, 이들 조합이 주도하는 파업의 물결이 러시아 산업을 휘청거리게 했다. 이처럼 노동자 조직과 지식인의 비밀결사 조직이 마르크스주의에 기반을 둔 러시아 노동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1895년에는 뻬쩨르부르그에 레닌이나 마르크스 이론에 의한 ‘노동자계급 해방투쟁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단체가 설립되자 40명에 이르는 간부들이 곧 체포되었음에도 다음 해에는 뻬쩨르부르그의 전 섬유 노동자의파업을 주도할 만큼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투쟁동맹’을 본받아 모스크바 등 모든 도시에 같은 이름의 단체가 속속 결성되었다.
 
 << 부활>>은  희망의 기도
 
 1898년 톨스토이는 10년 전에 계획하다 만 소설 하나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두호볼 교도를 캐나다로 이주 시키는데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친구인 법률가 꼬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1889년 소설을 쓰다가 톨스토이는 도중에 그만두었는데, 어떤 돈 많은 부인의 양녀가 된 핀란드 고아 소녀의 비극적인 일생 이야기였다. 그녀는 부인의 친척 남자에게 유혹되어 임신하게 되고 결국 집을 나오지만 살아가기 위해서 몸을 팔게 된다. 어느 날 손님의 돈을 훔쳤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배심원 가운데 옛날 그녀를 유혹했던 그 남자가 있었는데 너무나도 달라진 그녀의 모습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죄 갚음을 하기 위해 그녀와 결혼할 생각을 하였으나 아쉽게도 한발 늦어 그녀는 티푸스 옥에서 사망한다. 이런 이야기를 토대로 톨스토이는 줄거리와 인물을 여러 번 꼼꼼히 고쳐가면서 1899년 드디어 <불활>을 완성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네프류도프에게는 톨스토이의 전기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난다. 또 고위 관료인 도뽀로프는 종무원 장관 뽀베드노스쩨프를 모델로 삼았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에서 애인을 만나려고 서둘러 재판을 끝내는 재판관을 그려 넣거나, 감옥에서 행해지는 미사를 마치 오페라처럼 아름답게 묘사하였다. 이것은 정교회의 예배에 대한 분명한 모독처럼 보였다. <부활> 이 <니봐>에 연재되고 있던 1899년 11월 당시에도 하리모프의 대주교는 톨스토이를 마땅히 파문해야 한다고 종무원에 제소했다. 그러나 달리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던 종무원도, 1901년 톨스토이가 가장 아끼는 제자 쎌드로꼬프가 망명지 런던에서 정교회를 비방하는 문서를 출판한데는 격분하여 마침내 톨스토이를 정식으로 파문했다. 이 통고가 세상에 알려지기 무섭게 많은 이들이 항의 데모에 참여하였고, 격려의 편지와 꽃다발이 물밀듯이 전해졌다.
 
 모두들 그의 건강을 기원하다
 
 정교회에서 파문 당한 1901년 6월, 톨스토이는 아스나야 뽈랴나에서 말라리아에 걸렸다. 뚤라와 모스크바에서 불러온 의사는 하나같이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가족들에게 말했는데 톨스토이는 얼마안가 회복했다. 그러나 위독하다는 소문이 시외로 펴져 많은 문안 카드가 배달되었다. 그 중에는 문학 애호가 루마니아 황후도 있었다. 한편 정부는 비밀리에 훈령을 내려 톨스토이 장례에 즈음하여 불온한 데모라도 일어날 양이면 곧 중지시키라고 명령해 두었다.
 7월말 톨스토이는 또다시 병석에 누웠다. 이번에는 협심증이었다. 의사는 곧장 모든 작업을 멈추고 겨울 동안 따뜻한 지방에서 요양할 것을 권했다. 톨스토이는 어느덧 79세의 생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9월 5일 톨스토이는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빠닌 백작 부인이 제공해 준  크림의 가스쁘라에 있는 별장으로 출발했다. 철도 회사는 이들 톨스토이 가족을 위해 특등 차량 하나를 통째로 제공했다. 도중의 하리꼬프 역에서는 의외로많은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정부가 이번 여행에 대해 신문이 일체 다루지 못하도록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톨스토이의 건강을 염려하여 찾아왔던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학생들이었다.
크림의 별장에는, 그즈음 가슴을 앓고 요양중이던 체호프가 문안을 와주었다. 또 가스쁘라 근처에서 요양하던 고리끼도 경찰의 감시가 극심함에도 가끔씩 찾아왔다. 어느 날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뾰뜨르 세르게엔꼬가 그즈음으로서는 그리 흔치 않던 자동차를 몰고 가스쁘라 별장을 방문했다. 호기심 많은 톨스토이는 기어이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랜 시간 드라이브를 즐겼다.
 
내 작품을 모든 민중에게
 
톨스토이를 신봉하는 사람은 많았다. 예로 쩨르뜨꼬프를 들 수 있다. 그는 명문 귀족 출신으로 근위사관이 되었으나 1881년 제대하고 보로네지의 광대한 영지 속에 틀어 박혔다. 이 때가 27살이었는데 톨스토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성서를 연구하면서 영지 내 농민들의 생활을 개선시키고자 했다. 그는 1883년 이후 톨스토이가 가장 아끼는 제자가 되었고 무슨 일이건 함께 의논하였다. 90년대 초에 톨스토이는 그의 제안으로 자신의 모든 저작권을 누구나 마음대로 출판할 수 있도록 포기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삐야 부인은 생활상의 이유로 이에 맹렬히 반대하였고, 결국 1891년 가을에 톨스토이는 1881년 이후에 쓰여진 작품의 저작권만 포기하겠다는 취지를 공식으로 밝혔다. 소삐야에게는 쩨르드꼬프가 드나들면서 남편이 점점 자신과 집에서 멀어진다고 느꼈다. 그즈음 톨스토이의 집을 자주 방문했던 단골손님으로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따네에프와 역시 피아니스트인 골덴와이저가 있었다. 1896년 그들이 야스나야 뽈랴나에 한동안 머물게 되면서 여름 동안 톨스토이의 집에서는 이따금 연주회가 벌어지곤 했다. 특히 얼마 전에 가장 사랑스런 막내 이반이 죽어서 마음이 우울하던 소삐야에게는 음악만한 위안이 없었다. 그녀는 따네에프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이때 따네에프는 36살이었고 소삐야는 52살이었다.
가족들은 소삐야가 따네에프를 은근히 좋아하는 것을 금새 알아차렸고 톨스토이는 격렬한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그는 <끄로이쩨르 소나타>에서 아내에게 배신당한 남편의 처지와 자신이 비교된다는 사실에 더 한층 못 견뎌 했다. 그러나 소삐야의 사랑은 플라토닉한 혼자만의 사랑으로 끝났다.
 
 어떠한 전쟁도 죄악이다
 
 러시아는 1891년 시베리아 철도 건설 이래 극동으로 진출하려고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도 1874년~5년의 청일전쟁 이후 만주(중국 동부 지역)와 조선반도로 경제적 군사적 진출에 더더욱 힘을 기울였다. 1900년에 중국에서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한다는 구실로 러시아는 군대를 보내 만주를 차지하고는 좀처럼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러시아 정부는 국내 혁명 정세를 피하기 위하여 이 일대에서 작은 전쟁을 일으켜 승리한다면 국민들도 정부를 지지할 게 분명하다는 속셈도 작용했다. 일본 또한 시베리아 철도를 완성하기 전에 싸우는 편이 유리하다는 생각에서 1904년 선전포고도 없이 인천과 여순(旅順)에서 러시아 군을 기습 공격했다. 이것은 20세기 최초 제국주의의 전쟁이었는데, 이해 8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2회 국제연합에서 러시아와 일본 대표는 서로 사회주의적 견지에서 전쟁을 비난하면서 평화 협력을 서약했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외국 신문들은 앞을 다투어 톨스토이에게 달려와 러시아의 전쟁 수행을 찬성하는지, 일본의 기습공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는 이 질문에 엄숙하고 의연한 태도로 ‘나는 러시아 편을 들 수 없다. 그렇다고 더더욱 일본 편을 드는 게 아니다. 정부에 속아서 자신의 양심과 종교가 가로막는데도 전쟁터로 달려간 두 나라의 모든 군인들 편이다’라고 말했다. 톨스토이는  전쟁 자체를 반대함을 분명히 하기 위해 ‘반성하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톨스토이는 이 글에서 전쟁이 얼마나 비도덕적인고 비 인간적인지 설명했다. 이 글을 둘러싸고 러시아의 배타적 애국주의자들은 톨스토이가 조국을 배반했다고 비난하는 편지를 보냈다. 한편 그의 반전사상을 외경하는 세계의 인도주의자들이 보내는 많은 격려 편지를 읽고 톨스토이는 위로를 받았다.
 
 뽀그롬과 ‘피의 일요일’
 
 19세기 말의 러시아 제국 영내에는 약 500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정해짐 거주지에서만 살 수 있었고 교육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1880년 이후 뽀그롬이라 불리는, 조직적인 유대인 학살 및 약탈이 있었으나 정부는 보고도 못본 척했다. 러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 서남 러시아의 까시노프에서 특히 격렬한 뽀그롬이 일어났다. 목적은 유대인의 재산 약탈이었는데, 이 때 50명 여명이 살해되고 7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났다. 톨스토이는 이 사건에 항의하는 학자들의 글에 서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미국 신문과도 인터뷰하여 ‘ 이사건의 원인은 유대인에 대한 전통적인 편견뿐 아니라, 혁명으로부터 민중들의 관심을 돌려보려는 정부의 책략이 바탕에 깔려 있다’고 정면에서 정부를 비난하였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한다. 여순이 함락되고 러시아 구내의 형명 정세는 오히려 높아만 가서 1월 4일에 뻬쩨르부르크에서 대대적인 파업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작년 봄부터 수도의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있던 가뽄은 1월 9일 황제에게 보낼 청원서 운동을 일으켰으나 군대와 경찰의 일제 사격을 받고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 곳곳에서는 항의 파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6월에는 북해함대의 전함 뽀쬬므낀 호에서도 수병이 반란을 일으켰다. 혁명의 파도는 점차 높아져 10월 제네스뜨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이쯤 되자 황제도 어쩔 수 없이 양보할 수 밖에    없었고, 마침내 10월 17일 국회 개설, 선거권 확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이른바 ‘10월 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을 읽고 난 톨스토이는 ‘인민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의견을 말했다. 그는 전제는 입헌 제든 힘에 의한 지배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사랑과 죽음의 나날
 
 톨스토이는 70이 넘도록 소설.우화. 논문. 희곡 등 많은 글을 썼다. 이 대부분은 그의 사후 1911년에서 13년에 걸쳐 발표되었다. 만년의 대표 작품으로는 희곡 <산송장>과 소설 <하지 무라뜨>를 들 수 있겠다. <산송장>은 어떤 부부의 기묘한 이야기로 톨스토이가 1899년에 친구 다비도프에게서 들은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은 작품이다. 톨스토이는 이야기를 들은 이듬해 내용을 각색하여 <산송장>을 쓰기 시작했으나 결국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나서 1911년 1월부터 10월까지 <산송장>은 무려243개 극장에서 9000회 이상 공연되었고, 톨스토이의 희곡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성공을 거둔 작품이 되었다. <하지 무라뜨>의 집필에는 1896년경부터 1904년까지 8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 소설은 톨스토이의 까프까즈에서의 생활을 떠올리게 한다.
 1908년 8월 28일, 톨스토이의 8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1월 7일 뻬쩨르부르그에 준비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기획은 전 러시아로 퍼져나가 신문에서는 ‘톨스토이 탄생 기념’이라든지 ‘경축일’같은 굵은 활자가 눈에 들어왔다. 또한 국외에서도 서유럽뿐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 인도 등지에서 톨스토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획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이렇게 요란한 생일 파티는 딱 질색이었다. 그래서 준비위원으로 있는 친구 스따호비치에게 편지를 써서 축제를 중지하도록 힘써달라고 부탁하였다. 정교회는, 자신들이 파문한 톨스토이를 온 세상이 이처럼 하나같이 대규모 축제행사를 열려하는데 크게 분노했다. 종무원은 정식으로 통지를 보내 ‘톨스토이 백작을 축하하는 행사에도 참여하지 말도록’ 요청했다. 결국 공식적인 탄생 기념 축하행사는 취소되었지만 국내외에서 2000통이 넘는 생일 축전이 톨스토이에게 쇄도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깨어 있는 위대한 혼
 
 만년의 톨스토이는 스스로의 괴로움에서 찾아낸, 그리스도교의 도덕을 실행하기 위하여 술과 담배도 끊고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야스나야 뽈랴나의 쾌적한 생활도 거부하였고, 지금껏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살아온 데 대해 깊이 반성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엄격한 생활 태도는 소삐야에게는 차츰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되었다.
 톨스토이는 무슨 일이건 아끼는 수제자 쩨르뜨꼬프와 의논하였는데, 말을 나누다가도 소삐야가 방에 들어오면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1908년 여름 병상에 있던 톨스토이는 자기의 죽음이 멀지 않은 것을 깨닫고 비서 그세프에게 일기를 받아 적게 하였다. 그는 자신이 죽고 나면 모든 저작권을 사회에 내놓고 싶다고 말했다. 만일 이대로 실행된다면 1881년 이전에 출간된 작품의 저작권도 소삐야가 내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편의 일기를 본 소삐야는 톨스토이에게 항의하였고, 두 사람 사이에는 그 해 내내 냉랭한 바람이 일었다. 이듬해 여름, 톨스토이는 체르뜨꼬프와 상의하여 1881년 1월 1일 이전의 간행되지 않은 저작과 그 이후의 모든 작품 저작권을 포기하여 누구라도 출판할 수 있도록 했다.
 1910년 10월 28일 새벽, 톨스토이는 예전부터 생각해오던 가출을 결행했다. 딱히 어딜 가겠다는 작정도 없이 두산 마꼬비쯔끼 의사와 딸 샤샤(알렉산드르)를 깨워 자기 생각을 밝혔다. 그리고 아내에게 편지를 남겼다.
 ‘나의 가출이 가족 모두를 슬프게 하겠지만 부디 이해해주었으면 하오.내게는 방법이 없구려. 집에 있기가 너무도 힘이 든다오. 지금껏 호의호식하면서 살아왔지만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다오..,..,.’
 톨스토이는 마꼬비쯔끼 한 사람만 데리고 집을 나왔다. 그날 밤 8시에 두 사람은 오쁘찌나 수도원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톨스토이는 새벽녘까지 공개장의 형식을 취한 사형반대 논문 <유효한 수단>응 완성했다. 다음날 동생 마리아가 수녀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샤마르디노로 가서 오랜만에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그러나 다음날 샤샤가 불쑥 찾아와 어머니가 편지를 읽고는 너무도 절망해서 연못에 몸을 던져 자살을 기도했다고, 지금이라도 당장 어머니가 달려오실지 모른다고 말했다. 톨스토이는 서둘러 라잔?우랄선 3등 열차에 몸을 싣고 정처 없이 달렸다. 그는 기차 안에서 폐렴에 걸려 고열로 신음했다. 마꼬비쯔끼는 그를 가까운 아스따뽀보 역에 내리게 하여 역장 관사의 아이들 방으로 데려갔다. 톨스토이는 얼마 안 되어 혼수 상태에 빠져들었고 1910년 11월 7일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 되었다.
 
 
 
 
톨스토이가 남긴 인류 지혜의 유산
 
 
 
 
‘날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보다 귀한 일이 또 있을까?’
<인생이란 무엇인가>는 레프 톨스토이가 남긴 마지막 대저작이다. 톨스토이는 1886년 이미 민중교화를 목적으로 이 책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 1887년 <나날의 생각>이라는 제목으로 민중 사이에 널리 보급된 철학자와 성현들의 명언과 잠언을 담은 일력(日曆)을 만들었다. 이 일력은 바로 대저작인 <인생이란 무엇인가>의 바탕이 된다. 초판은 1904년에 <지혜로운 사람들의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개정판이 출간되기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정정 보완 가필 과정이 이루어졌다. 이 책은 1904년에서 1910년까지 톨스토이의 생애에서 3판이 인쇄되었다. 판마다 부제는 다음과 같다.
 
<삶의 길> <인생독본> <나날을 위한 지혜로운 생각>.
 
<인생이란 무엇인가>는 톨스토이의 인생관과 사상이 일목요연하게 집약된 묵상록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또한 러시아와 더 나아가 세계 질서에 대한 강력한 비판적 의지를 담고 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직접 겪은 파란만장한 일생의 경험을 토대로 신앙, 도덕, 교육, 혁명, 법률, 토지제, 병역, 사형제도 등 그 시대의 종교, 사회,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 걸친 온갖 모순과 불합리, 부조리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는 사회 밑바닥에 도사린 무서운 죄악을 낱낱이 고발함으로써 그 내부적 원인과 통렬한 진실을 규명하려는 작가의 의도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인간 내면의 본질적인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인간의 모든 사회적 죄악에 대한 속죄를 기본 전제로 인생의 진면목, 인생의 의의란 오직 ‘선에 대한 끝없는 희구’에 있다고 말했다. 모든 인간은 사랑을 바탕으로 선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이 선은 오직 진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가치라고 했다. 따라서 <인생이란 무엇인가>는 늘 깨어 있으려 애쓰면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진리를 갈구한 톨스토이 스스로 자신의 인생관을 가장 함축적으로 피력한 말이면서 동시에 이 대저작이 울리는 그의 내면의 목소리라 여겨져 이 책의 제목으로 삼게 되었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저작이 된 이 책, <인생이란 무엇인가>는 그의 체험적 인생역정과 궤를 함께하며 더욱 빛을 발한다. 그가 청장년기에 걸쳐 남긴 세계문학사상 손꼽히는 불후의 명작들은 폭풍과 격동의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톨스토이의 변화하는 인생관을 반영하고 있다.
1828년 9월 9일,이스나야 뽈랴나의 부유한 지주 귀족 집안 넷째 아들로 태어난 레프 톨스토이는, 16살 때 까잔 대학에 입학해 어학과 법학을 공부하던 중 불현듯 ‘대학은 학문의 매장소(埋臧所)’라고 생각하고 1847년 대학을 중퇴한다. 청년 톨스토이는 고향으로 돌아와 소작인의 계몽과 생활개선에 노력했으나 농노제도 사회에서 그의 이상이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고 실의에 빠져 몇 해 동안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다. 그 뒤 1851년 형 니꼴라이가 있는 까프까즈로 가서 사관후보생으로 포병대에 입대하게 된다. 이때 처음 단편소설 <침입>을 쓰기 시작하며 그 해 처녀작으로 기록되는 <유년시절>을 탈고해 작가로서 첫 발을 내딛는다.
청년기의 톨스토이는 여러 지방의 전투에 참전하며 <러시아 군인은 어떻게 죽는가> <지주의 아침> 등을 완성한다. 이때 톨스토이가 주로 관심을 기울였던 문제는 농민과 교육과 전쟁이었다. 군에서 퇴역한 다음해인 1857년, 최초의 유럽여행에서 그는 길로틴(단두대)에 의한 사형집행을 목격하고 서구 문명에 깊이 실망한다. 1862년 궁정시의 베르스 딸인 18살의 소피야와 결혼하고 대작 <전쟁과 평화> <안나 까레니나>를 완성하였으나, 이 무렵부터 인생의 의의와 신의 존재에 대해 심각한 사상적 동요를 경험하게 되며 정신적 대변혁기를 거쳐 마침내 종교에서 구원의 답을 찾게 된다.
톨스토이는 <참회록>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등의 논문에서 일찍이 근대문명과 국가를 부정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하는 그 자신의 독자적인 무정부주의관을 확립한다. 만년에 이르러 <이반 일리찌의 죽음> <끄로이쩨르 소나타> <부활>을 발표한다. 70살의 톨스토이는 구체적으로 그즈음 사회제도와 형벌 제도에 대한 강한 문제성을 제기하며 그에 대한 허위와 위선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로맹 롤랑는 <부활>을 일컬어 “이 작품은 세기의 양심에 대한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위대한 문호 톨스토이는 이처럼 인간과 진리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파고들어 연구하는데 온 생애를 바쳤다. 1880년 이후 그는 위선에 찬 러시아 귀족사회와 러시아 정교에 회의를 갖고 마침내 원시 기독교 사상에 몰두, ‘톨스토이주의’라고 불리는 사상을 이론화함으로써 예술가 톨스토이에서 도덕가 톨스토이로 변모한다. 이 정신적 위기와 그 극복 과정이 이른바 톨스토이의 ‘회심’(回心)이며, 그의 <참회록>에 서술된 고백 내용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톨스토이는 금욕생활에 돌입해 1880년 중반 드디어 <인생이란 무엇인가> 구상이 체계화 단계에 이르게 된다. 톨스토이가 처음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영감을 글로 옮기기 시작한 때는 1884년이었다. 1년 365일을 위한 세계 모든 민족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의 빛나는 지혜’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해 3월15일의 일기에 그는 적고 있다.
‘나 자신이 주기적으로 되풀이해 읽을 책을 만들어야겠다.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노자, 부처, 파스칼, 신약 성경 등.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기도 하다.’
1885년, 톨스토이는 조수인 쩨르뜨꼬쁘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앞으로 출판될 이 책은 소크라테스,에픽테토스, 아놀드, 파커 등의 위대한 사상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거대한 내면적인 힘과 인식, 행복을 줄 것일세..,.., 그들은 인간성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하여, 삶의 의미에 대하여, 덕에 대하여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네. ..,.., 나는 삶에 대하여, 삶의 선한 길에 대하여 그들과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책을 쓰려고 한다네.’
치밀한 구상과 세심한 고찰 과정을 거쳐 <인생이란 무엇인가>가 완성되기까지 장장 15년이 넘는 기간이 소요됐다. 톨스토이는 주위 사람들에게 되풀이 얘기했듯 ‘가장 뚜어난 저술가들 가운데서’ 까다롭게 선별해 그들의 저술과 사상을 바탕으로 이 책의 내용을 구성했다. 그들의 철학적 견해와 문화적 배경 그리고 역사적 시기는 매우 폭넓고 다양하다.
톨스토이는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칸트와 같은 유명한 사상가와 더불어 미국 오리건 출신의 무명 저널리스트 루시 말로리의 사상을 발견하고 크게 놀랄것이다.’
1904년과 1907년 사이에 톨스토이는 개정판을 썼다. 그는 1904년 6월 3일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인생독본>의 작업으로 분주하다,..,.. 다른 것은 도무지 할 수 없다..,.., 철학자들의 생각을 선별해서 다음 순서대로 모았다. 신, 지성, 법, 사랑, 인간의 신성(神性), 믿음, 유혹, 말, 자기 희생, 영원성, 선(善), 친절, 사람과 신의 합일, 기도, 자유, 완전, 노동 등.’
1905년 8월, 톨스토이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인생독본>을 개정하고 증보했다.이제 두 배 부피가 되었다. 두 달 동안 신문과 잡지를 포함해 다른 것은 전혀 읽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매우 만족스럽다.’
 
이 새로운 내용은 여러 해 동안의 묵상을 통해 기록해 둔 것과 이 전의 일기장에 적어 둔 자신의 단상(斷想)을 800개쯤 더한 것이었다. 톨스토이는 하루하루의 일기를 자신의 단상으로 시작해 다른 출처의 인용문을 덧붙이고 다시 자신의 생각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또한 매주 끝에 ‘이레째 읽을 거리’를 실어 한 주간의 도덕, 철학적 또는 종교적 주제에 상응하는 52개의 짧은 이야기들을 포함시켰다. 이 이야기는 톨스토이가 직접 쓴 것이며, 나머지는 플라톤, 부처, 또스또예프스키, 파스칼, 레스꼬프, 체홉 등의 글에서 발췌했거나 개작한 것이다. ‘이레째 읽을 거리’에 등장하는 톨스토이의 산문체는 그의 초창기 소설들에서 보이는 세련미 넘치는 문체와 대조를 이룬다. 뒷날 빠스떼르나끄와 솔제니친이 감탄해 마지 않았던 이 이야기들은 명료하고 간단하고 소박한 언어로 기록되었으며 모든 일반 대중을 위해 씌여진 글이다. 톨스토이는 이 이야기들에서 형식의 단순성과 철학적 깊이를 결합시켰다. 가장 단순하고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쓰고자 했던 톨스토이는 일찍이 몇몇 부유층과 특정 계급이 향유하는 고급문화 속의 소설쓰기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수백만 독자들을 즐겁게 하고 그들 민중의 삶에 실제 지침이 될 수 있는 정신적 안내서를 목표로 했다.
1904년 12월 21일 톨스토이는 2판 교정쇄를 검토한 다음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인생독본>을 창작할 때 세계의 가장 뛰어나고 지혜로운 사상가들과 교류하면서 내내 높은 영적. 도덕적 경지를 경험했다.’
이 책은 개정판에서<레프 톨스토이가 매일 읽을 수 있도록 수집하고 정리한 진리와 삶과 행동에 관한 많은 저술가들의 지혜로운 생각들>로 바뀌었다. 그리고 처음 간행될 때부터 톨스토이는 언제나 이책을 책상 위에 가까이 두고 자주 뒤적이곤 했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날마다 그는 책에 제시된 그날의 생각들을 읽었고 친구들에게도 이 습관을 권했다. 1908년 5월 16일, 톨스토이는 꾸제프라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지구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고서 어떻게 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을 읽기 때문에 나는 날마다 아주 행복합니다.’
톨스토이는 생애 마지막 해인 1910년에 세 번째로 개정된 이 책을 준비해<삶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는 소련 치하에서 영적 측면을 지향하며 종교적 인용문이 지나치게 많다는 이유로 출간이 금지되었다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1995년 러시아에서 다시 이책이 출간되자 전 국민적 인기를 끌게 돼 짧은 기간 내에 300만부 이상이 판매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톨스토이는 이 책의 초판이 간행되었을 때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내 저술은 시간이 흐르면 잊혀질지 모르지만 이 책은 절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대문호임과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였으며 또한 종교가였다. 그런 이유에서 그는 세계문학사상 불굴의 영예를 누리며 21세기에 들어서도 도스또예프스키와 더불어 최고의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부유한 지주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시골 초라한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죽기까지 톨스토이는 늘 인생에 대해 절박한 고뇌를 체험하고 거기서 얻은 사상을 현실에서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러시아의 부조리와 죄악에 대해 다른 위대한 사상가들처럼 행동하는 지성으로 대신 속죄하려고 했던 것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는 도덕적 저술가로서 인간의 양심을 크게 뒤흔들어 놓은 톨스토이의 마지막 저작이다. 그 생애 만년을 장식하며 인간으로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스스로 일생을 통해 얻은 교훈을 집대성한,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삶의 지침서이다. 또한 인류 최고의 지성들과 정신적 교류를 가능케 하는 사상, 정신, 종교, 예술의 총체적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1910년 11월 7일 라잔 우랄 철도의 작은 간이역 아스따뽀보(현 톨스토이역) 역장 관사에서 운명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의 편집자였던 비류꼬프에 의하면, 톨스토이는 임종을 앞두고 그의 머리맡을 지키던 딸 따짜나에게 <인생이란 무엇인가>의 10월 28일 부분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한다. 그날은 톨스토이가 죽음을 앞두고 말없이 집을 나온 날이었다. 따쨔나가 나직한 목소리로 글을 읽어주자 톨스토이는 중얼거렸다고 한다.” 모두 나무랄 데 없어. 매우 간결하고 훌륭해. 그래, 정말 그렇군!”
이때 그가 딸 따쟈나에게 읽어 달라고 부탁한 10월 28일의 계명은 다음과 같다.
‘고뇌는 활동에 박차를 가한다.그리고 우리는 오로지 활동하는 가운데서만 생명을 느낄 수 있다.’        * 칸트
‘편안한 환경에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곧 과거가 될 것이니, 가진자는 잃어버릴 것을 생각하고, 행복한 자는 괴로움을 배워두어야 하리라.’   * 실러
얼마 뒤, 임종을 맞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진리를..,.., 나는 영원히 사랑한다. ..,..,왜 사람들은?”이었다.
 
우리는 젊은 날 1950년대 청계천 책방 시절 대문호 톨스토이가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인류 지혜의 유산을 초역중역본으로 읽고 감명을 받아 러시아 판 완역본을 완전한 한글문장으로 복원해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꿈은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채수동이 주 러시아 대사관 근무를 하며 3천만 권을 소장한 세계 최대 레닌도서관을 드나들면서, 그리고 한국문학을 전공한 고산이 세계문학사상전집을 편찬하게 되면서 싹트기 시작했다. 1958년 모스크바 국립예술출판소에서 완간한 <톨스토이 저작전집> 전 90권에서 이 대저작의 마지막 개정판인 41, 42<레프 니콜라이비치 톨스토이가 하루하루 나누어 읽을 수 있도록 정리한 진리와 삶과 행동에 관한 여러 저술가들의 지혜로운 생각들>을 텍스트로, 그리고 영어판.독일어판.불어판.일어판을 참조했다. 이 본격적인 대작업은 1993년 1월에 시작하여 2003년 12월에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10년이라는 각고의 세월을 뭰헨대학원 김양순, 파리 사회과학 고등대학원 이희영, 치바대학원 김은희의 열정적인 도움으로 이겨낼 수 있었음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톨스토이 탄생 177주년을 맞으며
 
                                        채수동.고산  
 
 
Posted by joogun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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