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펭밍 Fengming 2007 중국 현대사 다큐 문화대혁명 증언 역사 자막 영화 지식인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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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펭밍, 한 중국인의 회상(和鳳鳴).2007
2017.06.26
ma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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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ine
http://www.cine21.com/movie/info/?movie_id=23365
http://my.clubbox.co.kr/antig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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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ngming - A Chinese Memoir Part I.smi (99.5K)
Fengming - A Chinese Memoir Part II.smi (99.9K)
DVD (3.07G/3.18G) | FPS : 25
감독: 왕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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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8월, 란저우에 해방군이 입성하고 17살이던 허펭밍은 감격에 겨워 혁명에 동참하기로 결심한다.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당시 창간했던 간쑤일보에 들어간다
1957년 5월 마오쩌뚱이 주창했던 '백화제방 백가쟁명'에 따라, 허펭밍의 신문사 동료며 남편 왕징차오가 간부들을 비판하는 글을 쓴다. 이후 역풍이 불어 반우파투쟁이 시작되면서, 왕징차오는 우파분자로 지목되고 허펭밍 또한 연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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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두 사람에게는 공직 추방과 오지 농장의 노동개조 처분이 내려진다
1960년 12월 왕징차오는 3천명의 수용자 중 2천5백명이 굶어죽은 악명 높은 지아비앙고 농장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1961년 허펭밍은 재심사를 신청해 신문사에 복직되지만, 1969년 다시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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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펭밍의 집 거실에서 구술된 중국의 격동기를 살아간 한 중국 여성의 연대기
영자막을 옮겨 착오가 많을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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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ubscene.com/subtitles/he-fengming-chronicle-of-a-chinese-woman/korean/1585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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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ed2k 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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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utube.com/watch?v=dn6V7jJ9zRI
Fengming A Chinese Memoir 2007 CD1 - English Subtitles
http://www.youtube.com/watch?v=rWvtIs80nos
Fengming A Chinese Memoir 2007 CD2 - English Subtit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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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3. 28.
Live4allnow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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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hipbig.tistory.com/107
BIG HIP :: [82 july.aug 2013] 왕삥,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 ③
2015.07.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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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북서쪽에 위치한 강제 노동 수용소 지아비앙고 Farm Jiabiangou 에 대한 것이다. 그 수용소는 1957년 ‘우익인사들’을 잡아두기 위해 설치되었고, 1958년에서 60년의 대기근 당시 3000명 이상의 죄인 중 대부분이 그곳에서 굶어죽자 폐쇄조치했다. 1961년 초 당시 정부는 모든 억류자들에게 귀향하라 명령했고, 단지 몇 백 명만이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을 뿐이다.
양샨휘 ??惠 의 책 『 지아비앙고 로부터의 이야기 Stories from Jiabiangou 』에서 처음 그 수용소에 대한 것을 들었다. 2005년에 양샨휘는 내게 허펭밍 和?? 을 소개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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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ngming - A Chinese Memoir Part I.smi (99.5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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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펭밍
한 중국인의 회상
살아온 이야기를
처음부터 하겠어요
해방 직전에 란저우 대학에서
학생을 뽑았어요
쉽게 란저우 대학
외국어 계열에 들어갔어요
영어를 좋아해
영어 전공이었어요
고등학교 내내
대학 가기를 꿈꿨어요
늘 착실한 학생이었고
대학에 가 지식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인물이 되려 생각했어요
그래서 란저우 대학에 시험을 봐
합격했어요
1949년 8월 26일에
란저우가 해방됐어요
해방군이 시내로 들어왔고
모두 나가 환영했어요
얼마 뒤에 친구들과
란저우 대학을 찾았어요
해방군들이 거기 와서
혁명가곡집을 나눠줬어요
"너는 등대"나 "동방홍"같은
금세 그 노래들을 외웠어요
해방감에 젖어 하늘은 푸르고
모든 게 달라 보였어요
갑자기 대학이
무의미하고 따분해졌어요
혁명에 동참하는 길을 찾으려고
란저우 대학 입학을 포기했어요
당시 란저우에서
간쑤일보가 창간되어
사원을 모집했어요
고등학교 때 작문을 잘 했고
기자와 편집사원을 뽑는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어요
혁명의 물결에 자신을 던져
자기를 단련하고
인민을 위해 봉사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대학을 포기하고
간쑤일보에 지원했어요
채용 과정은 간단했어요
자기소개서를 쓰라고 했어요
17살이었고 소개랄 게 없었어요
가족 사항과
왜 지원하게 됐는지
혁명의 포부를 간단히 적었어요
면접 때 청삼을 입고 갔는데
채용된 뒤에 남들처럼
회색 제복을 내줬어요
그 제복을 입고 보니
진짜 혁명가가 된 것처럼
우쭐했어요
1957년 5월에 베이징에서 열린
전국농업전람회에
참석하게 됐어요
각지의 신문사 대표들을 보냈는데
간쑤일보의 농민보
대표로 뽑혀
간쑤일보 부주필과 함께
베이징에 갔어요
당시엔 베이징에 갈 기회가
흔치 않았고
더구나 전국농업박람회는
큰 행사였어요
아주 운좋게 뽑혔어요
간쑤일보에 다니며
일 열심히 했고
그에 대한 보상과
격려 같은 것이었어요
5월 1일 당 중앙의 새로운 지시가
신문에 발표됐는데
그게 반우파 운동의 시작이었어요
당시엔 아무도 크게 생각하지 않았고
우리는 관광하느라 바빴어요
그때 나는 베이징이 처음이라
모든 명소를 다 보고 싶었어요
자금성과 하궁 등등
또 란저우의 여고 동창들과도
만났어요
시장에서 여주를
파는 걸 보고 놀랐어요
란저우에선 살 수 없었는데
베이징에선 어디나 있었어요
당시 시세로 근당
5,6마오 밖에 안 했어요
베이징으로 가기 직전에
인민일보 사설에
정풍운동이 나왔는데
아까 말했듯이 큰 관심도 없었고
영향을 받을 줄 몰랐어요
그리고 란저우로 돌아왔어요
근데 그 사설이
반우파 투쟁의 신호였어요
당이 계속 민심을 동원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때만 해도 너무 순진했어요
당 지도부의 의견에 고무되어
적극 참여하기로 하고
큰 대자보를 써서
일부 하급 간부들의
잘못을 지적했어요
별 생각 없었어요
남편인 왕징차오가
내가 베이징에 가 있는 동안
몇 편의 글을 썼어요
지도부에서 시킨 일이었어요
당시 마오 주석이
인민일보의 논조를 바꾸라는
글을 실었어요
그땐 문회보가 사상의 전위였고
인민일보는 뒤쳐졌어요
중앙의 지시를
간쑤일보는 따랐어요
간쑤일보 인원 중에
제일 진보적이고 유능한
필진을 동원해
새 운동에 관한 글을 쓰게 했어요
그때 남편이 쓴 첫 글이
"관료주의에 관한 소고"였어요
이 글이 신문사를
크게 술렁이게 했어요
그해 2월에 마오 주석이
유명한 연설을 했어요
인민 내부의 모순에 관한 것으로
과도한 관료주의를 비판했어요
"문화와 학술 사상 부문에
백가쟁명이 이뤄져야 하며
백화제방과 백가쟁명으로
관료의 인민 억압을 막아라"
남편은 마오 주석의 부름에
호응한 것이었어요
아주 솔직하고 예리한 글이었고
힘찬 비판이었어요
당시 관료주의가
인민을 억압한다 생각했고
"지위를 과시하고 무능하다"
했어요
아픈 곳을 찔렀고
큰 반향을 일으켰어요
다들 잘 썼다고 했어요
그 뒤에 두 번째 글을 썼어요
그때 썼던 게...
"간부의 세가지 이반"으로
당과 지도부, 대중에서 멀어진
간부들에 관해서였어요
일부 간부들이 건설적인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지적했어요
물론 이 글을 상부에선
곱게 보지 않았어요
일부 간부와 아첨배들이
징차오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대중이 거기 따랐어요
이제 지도부도 쓴 글을
이미 못마땅게 여겼고
'독초'란 말이 나돌았는데
남편은 몰랐어요
그리고 세 번째 글을 썼어요
그 글의 제목이
"정서의 충돌"이었던가
이 세 번째 글은
발표되지 못 했어요
당시 왕징차오는 간쑤일보의
주요 필자였고
지도부에서 유망한 인재로
높이 평가했어요
시안의 서북대학을 다녔고
시안이 해방됐을 때
깐수 공작단에 참가해
란저우로 행군해왔어요
1949년 9월 간쑤일보 창간을
서북대학 동창들과 주도했어요
핵심 인물 중 하나였고
최고의 필자였어요
중요한 탐방이 있으면 파견했어요
반우 투쟁이 시작되면서
남편의 글들이
불온하다 낙인 찍혔어요
당시 나는 우샨에
탐방나가 있었어요
신문사에서 반우 투쟁이
시작된지도 몰랐고
거기 관련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농민보의 상사가 연락을 했어요
빨리 돌아와서 투쟁에 참가하라고
우샨에 있는 동안
남편에게 자주 편지를 썼어요
백화제방 기간이었고
편지에서
우리에게 우파 성향이 있나 물었어요
당시는 아직
자기 반문과 모색을 통해
발전하려는 시기였어요
돌아와 투쟁에 참가하라는
편지를 받았을 때
그 일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상도 못 했어요
기차를 타고 란저우로 돌아왔어요
자정이 되어 집에 도착해
남편은 잠자리에 들었어요
씻고 잠자리에 갔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간쑤일보에 범죄집단이 있는데
그 두목이 나 왕징차오라 한다"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반당 반사회주의분자라
규탄할 수 있고
더구나 범죄집단이라니
6, 7명을 한패로 규정했다 했어요
그러면서 열흘째 밤낮으로
비판회를 연다고 했어요
당시 간쑤일보 4층 대회의실에
2백명이 모여
비판회를 시작했어요
그때 편집부 인원이 백명이었고
다른 부서 인원이 백명이었어요
이 모든 사람이 며칠째
비난을 퍼부었어요
범죄집단의 두목이라고
어떻게 하루 아침에
이런 일이 생겼는지
짐작도 안 갔고
결국 나까지 우파분자로 찍힐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믿을 수가 없었어요...
왜 남편이 정치 박해의
목표가 됐는지 몰랐어요
그날 밤 한숨도 못 잤고
남편에게서
비판회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튿날 아침에
평소처럼 일하러 갔어요
남편은 문화부에서 일했고
나는 농민보 소속이었어요
당시 책상 위에 걸려 있던
홍기 경연 실적표가
아직 기억나요
우리 반에서 홍기를 많이 탔어요
돌아오니 동료들이
일을 넘겨줬지만
말 한 마디 없었어요
오후에 나는 2층에서 일했고
남편은 3층의 비판회에 있었어요
나는 참석이 허용 안 됐지만
시인하라고 외치는
고함 소리가 들렸어요
남편이 당과 사회주의의
원수라면서
화강암같은 머리를
묘비로 써야한다고 했어요
헛소리 한다고 외쳐댔고
남편도 헛소리라 맞받아쳤어요
남편은 반당 반사회주의자가
아니었어요
당시 상황이 그랬어요
말할 틈을 안 줬고
말문을 막아버렸어요
대화를 통한 비판회라 해놓고
일방적인 대화였어요
그렇게 한 주가 지난 뒤에
나에 대한 대자보가 나붙었어요
분명히 선을 긋고
왕징차오를 비판하라 했어요
이렇게 썼어요
"왜 늘 서로 말을 맞추고
보조를 함께 하느냐?"
분명히 선을 그으라는데
어떻게 그러겠어요?
반당 반사회주의자가
아닌 줄 알면서
어떻게 남편을 비판해요?
일주일 뒤에 나에 대한
비판회를 시작했어요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계속할까요?
몇 주 뒤에 비판회가 시작됐고
나한테는 '소우파'라 했어요
혁명에 참가한 날부터
당의 노선을 일관되게 따랐어요
지도부가 시키는대로 다 했고
양심적이고 성실하게
열심히 일했어요
그래서 내 비판회에는
20명쯤만 모였고
대개 농민보 동료들이었어요
하지만 처음부터
우파분자로 낙인찍혔고
모두 앉아 있는 앞에서
차렷 자세로 서 있어야 했어요
갖은 비판과 중상을 들었어요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부끄러워 죽고 싶었어요!
혁명을 위해 대학을 포기했고
그토록 혁명에 매진했는데
1949년부터 1957년까지
일 잘한다는 소리만 들었어요
근데 반당 반사회주의자라니
그 자리에서 죽고 싶었어요
하루 아침에 계급의 적이 됐어요!
비판하고 비난하고
그 중에 어떤 이는
왕징차오가 글 쓰는데
공모했다고까지 했어요
그때 베이징에 있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물었어요
집에 있을 때
이야기했을 거랬어요
사전에 짜고 이야기했다고
비밀을 털어놓으랬어요
몰래 한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비밀 같은 건 없었어요
우린 처음부터
당과 사회주의의 사랑을
나누며 결합했어요
둘 다 일에 뛰어났어요
남편은 대학을 그만 두고
혁명에 참가했고
난 대학에 갈 꿈을 접었어요
당시 아무나 란저우 대학에
못 들어갔어요
많은 고교 동창들이 못 들어갔고
몇 안 되는 합격자 중
하나였어요
혁명을 위해 다 포기하고
당에 헌신했어요!
근데 반당 반사회주의자라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요
고개를 들 수 없었고
차라리 죽는 게 나았어요
비판회 중에는
말도 못 하게 했어요
더우기
한 마디 변명도 못 하고
온갖 비난과 중상을
듣고 있어야만 했어요
그날 밤 집에 왔을 때
너무나 속상했어요
징차오에게
비판회 이야기를 했어요
나더러 우파분자라 했다고
몇 주째 겪어봐서
내 심정을 잘 알았어요
나를 안아주며 말했어요
"우리 예쁜 샤오 자오자오를
왜 그렇게 괴롭히지?"
아직 아주 젊을 때였어요
여러 애칭으로 불렀지만
샤오 자오자오라
한 적은 없었어요
비판회가 있고 나서야
그렇게 불러줬어요
집에선 그럴 수 있어도
냉혹한 세상에선 무력했어요
입을 열 수 없었어요
달리 날 위로할 수 없었어요
그땐 죽는 게 낫다 생각했어요
살기 힘들었어요
그래도 자살하지 않았던 건
이기적인 것 같아서예요
내가 죽으면 징차오 혼자 남아요
애들도 둘인데
혼자 키우게 둘 수 없었어요
내가 죽으면
어미 없는 애들이 돼요
엄마 없이 둘 수 없었어요
죽고 싶을 때마다
남편과 애들을 생각했어요
남편과 애들이 고생하게
둘 수 없었어요
그 뒤 비판회는 계속됐어요
대개 비판회는 오후에 열렸고
오전엔 사무실에 있었어요
일을 맡기고 나갔어요
하루는 사무실에 있다가
죽고 싶은 마음에
죽음을 결심했어요
"관두자, 너무 고통스럽다
죽는 게 낫다" 생각했어요
사망의 계곡에 들어가면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 같았어요
가족 생각도 안 났고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사무실을 나와
수면제를 사러 약국에 갔어요
불면증에 걸려본 적이 없어서
무슨 약을 사야할지도 몰랐어요
약사가 얼마나 필요하냐고 묻길래
정상 복용량보다
10배나 20배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곧장 집에 와
약을 다 삼켰어요
약을 먹고 누웠어요
사무실을 나오다가
탁아소의 막내아들과 마주쳤어요
'엄마, 엄마' 불렀는데
모른 척했어요
더는 자식마저도 안중에 없었어요
고통에 못 이겨 죽고만 싶었어요
그래서 집에 와
약을 삼키고 누웠어요
사무실로 안 돌아오자
동료들이 걱정됐나봐요
숙사로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왜 나갔는지 물었어요
빈 약 봉지를 보더니
뭐가 들었는지 물었어요
이미 누가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어요
아무 것도 아니라 했더니
사무실로 돌아가자고 했어요
가기 싫었지만 억지로 데려갔어요
알고보니 약이 듣지 않았어요
며칠 동안 졸리더니 지나갔어요
아무도 내가 한 일을 몰랐어요
당시 징차오를 간쑤일보
최고의 우파분자라 여겨
신문출판계의 대 비판회가
열리게 됐어요
간쑤일보를 포함한 신문과
출판, 방송계까지
강당에서 비판회를 열었어요
나도 가야 했는데...
아직 이름이 신문에 안 났을 때라
주목을 끌지 않으려고
뒷구석에 가 있었어요
비판회가 시작되고
우파분자라 호명하며
하나하나 앞으로 불러냈어요
다음에 의자에 올려보내
그대로 서 있게 했어요
그걸 '공개'한다고 했어요
다음에 누가 외치기 시작했어요
"왕징차오의 처를 세워라!"
그래서 숨어 있던
구석에서 끌려나와
남들과 함께 서야 했어요
바로 그 공개 자세로
비판회는 점점 가열됐어요
무엇보다 그렇게 서 있는 게
견딜 수 없었어요
그런 비판회가 서너 차례
더 있었어요
전체가 다 모이거나
신문 쪽만 모이거나
비판회가 있으면 으례
간쑤일보의 왕징차오가
범죄단 두목이고
범죄 계획과 비밀 음모를
실토하라 했어요
요구가 점점 강해졌어요
한 번은 비판회가 끝난 뒤
남편이 먼저 사무실을 나갔는데
집에 와보니
살충제 냄새가 났어요
당시 숙사에 빈대가 많아
보건소에서 '66분'이란
살충제를 타왔어요
침상 밑에 뒀는데 병이 없어졌고
집안에 약 냄새가 진동해
남편이 먹었을까봐
잔뜩 겁먹었어요
"먹었어? 먹었어?" 물었어요
울면서 계속 물었어요
"먹었지? 먹었지?"
먹을 생각을 했지만
못 했다고 했어요
반당 음모를 자백하라는
압박이 심하댔어요
하지만 처음부터 조작된 걸
어떻게 자백하겠어요?
자백을 않자
비판회는 아주 험악해졌어요
그래서 죽는 게 낫다고
느꼈나봐요
그래서 자살을 생각했고
약을 안 먹었다는 걸 알고서야
겨우 마음이 놓였어요
그날 밤 식사도 않고
불도 안 켠 채
둘이 함께 누워 있었어요
징차오는 내 어깨에 기대 울었어요
결혼한 지 7,8년 됐는데
내 앞에서 운 적은 없었어요
그때 우는 걸 처음 봤어요
없는 음모를 자백할 수 없댔어요
범죄니 비밀 음모니
다 조작된 것이었어요
그땐 둘 다 아주 비참했어요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혼자 남아 고통받을 걸 알기에
서로를 떠날 수 없었어요
그 모든 고난 속에서
사랑이 더 진해지는 것 같았어요
그 어느 때보다 친밀했어요
사랑이 고난을 겪으면서
꽃피웠고
아주 아름다운 것이었어요
둘만의 것이라 더욱 소중했어요
다른 사람과는 나눌 수 없고
우리만 아는 것이었어요
그날 밤은 괴로우면서도 달콤했고
슬픔 속에 깃든 기쁨이었어요
결국 비판회는 지도부에서
뜻한대로 끝났어요
이른바 범죄집단
우파로 낙인 찍힌 명단이
신문에 발표됐어요
결백하든 않든 시인해야 했어요
명단에 오른 모두가
자인서에 서명해야 했어요
좋든 싫든 서명해야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서명하고 나면
운명이 결정됐어요
마침내 1958년 4월 하순에
처분이 내려졌어요
간쑤일보의 우파로 지목된
7,8명 중에
첸슈렌이란 남자가 있었어요
같은 숙사에 살진 않았는데
처리가 결정났을 때
이미 죽은 뒤였어요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들었어요
그게 죄의 증거고
처벌을 벗어나려 죽었다 했어요
비판회에 안 나와 집에 가보니
가족들도 모르게 자살한 뒤였어요
죽은 뒤에도
비판회는 끝나지 않았어요
처벌을 면하려고
죽은 거라 주장했어요
아무튼 7,8명을 우파로 처리했는데
계속 명단을 덧붙였어요
5명을 범죄집단으로 추가했어요
대부분 평소에
말도 안 해본 사람들인데
내 이름을 거기 끼워 넣었어요
왕징차오의 역겨운 처라면서
그렇게 한패 취급했어요
4월 하순에 처분이 결정났고
남편이 간쑤일보의 최고 우파라면서
태도가 악질이랬어요
비판회에서
헛소리라 맞받아쳤다고
태도를 문제 삼았을 거예요
극우분자로 결정나
공직에서 배제되고
지아비앙고의 농장에서
노동교양을 받게 됐어요
나도 태도가 나쁘다고 했지만
처벌이 극심하진 않았어요
5급 강등 됐어요
행정 18급에서 23급으로
그때 애가 둘이었는데
큰애는 유치원에
작은애는 탁아소에 있었어요
징차오가 상사에게 부탁했어요
내가 란저우에서 노동하면서
애들을 돌보게 해달라고
친정어머니가 몇 년째 아프셨고
우리가 부양했어요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혼자 애들을 돌볼 수 없었어요
상사는 요청을 거절했어요
그러면서 다른 제안을 했어요
징차오는 고향에 돌아가
노동하던가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었어요
노동교화소에 안 가도 됐어요
근데 노동교양을 받으면
우파란 낙인을 더 빨리 벗고
사회에 복귀할 수 있댔어요
그땐 우리가 너무 순진했어요
정말 더 빨리 정치적 복권이
될 거라 믿었어요
또 남편은 오랫 동안
고향에 가지 않았어요
지금 이렇게 가는 건
면목이 없고
정치적 복권이 무한정
늦춰질지도 몰랐어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지
끝이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
절대 안 보냈을 거예요
지아비앙고 농장으로 가는 건
죽음의 길이었어요
근데 순진하게 당과
복권 약속을 믿었어요
그래서 4월 28일인가 29일에
함께 기차를 타고
서로 다른 농장으로 향했어요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튿날 오후에 남편이 내릴
주취안에 닿았어요
남편은 한 간부에게
내가 내릴 안시까지
동행하면 안 되겠는냐 물었어요
남편은 나를 걱정했어요
20대 때 나는
아주 마르고 허약했어요
간쑤일보의 여동료들이
강풍에 날아갈 거라 놀렸어요
집안이 풍족하진 않았어도
먹고 살만큼은 됐어요
혁명에 참가한 뒤론
의식주는 걱정 없었어요
남편과는 달리
큰 고생 안 해봤어요
그래서 내가 안시까지
무사히 가는 걸 확인하고
다시 자신에게 배정된
지아비앙고로 돌아오려 했어요
근데 간부가 허락하지 않았어요
또 남편은 공직을 잃고
다시 돌아올 차비도 없어서
주취안에서
내릴 수 밖에 없었어요
기차에는 동행이 대여섯 있었는데
다 우파로 지목된 사람들이었어요
그 중 우리만 부부라
다들 딱하게 여겼나봐요
모두 남편의 짐 내리는 걸
도왔고
작별의 악수를 했어요
내가 끝으로 작별인사를 한 뒤
남편을 역에 남기고
계속 안시로 향했어요
역에 혼자 선 모습을 보고
가슴이 미어졌어요
아주 슬프고 창백한 얼굴로
손도 못 흔들었어요
너무나 비통한 심정이었어요
다시 만날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몰랐어요
그 순간에 생각했어요...
자신보다 나를 더 걱정한다고
내가 남편의 세상이고
하늘이고 태양이었어요
근데 갑자기 태양이 사라졌어요
영원히 나를 잃을까
걱정했던 것 같았어요
나를 잃으면 자신은
암흑 속에 잠기게 된다고
나는...
벼락 맞은 기분이었어요
앞날이 막막했어요
홀로 닥칠 고난을 어떻게 견디나
란저우에선
그 비판회의 와중에도
집에 오면 밖에서 할 수 없던
다정한 말들이 오갔어요
이젠 떨어지게 됐으니
누구한테 하소연해요?
아픈 마음을 누구한테 털어놔요?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었어요
자유를 잃고
가까운 친지들에게
호소할 권리도 잃고
그랬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남편을 남겨두고
계속 안시로 향했어요
내가 배치된 곳은
안시현에서 3,40리 떨어진
'시부 농장'이었는데
철길이 닿지 않았어요
우리에겐 짐이 많아서
작은 여관에서 잠시 머물렀어요
간쑤에선 이런 말이 있어요
"지아위관을 나서면 눈물 난다"
그 관문을 넘어왔으면서도
내겐 해당 안 된다고
순진하게 생각했어요
농장 노동을 통해
자신을 개조한다 여겼어요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하면
당이 복권시킬 것이며
인민의 품으로 되돌아갈 거라고
그럼 새출발 할 수 있다고
앞으로 겪을 고생을
상상도 못 했어요
며칠 뒤에 모든 짐들을
트랙터 짐칸에 싣고
농장으로 향했어요
3.40리의 먼 길이었고
아침 먹고 곧 출발했어요
농장은 좋아보였고
작은 환영식까지 열어줬어요
신설된 집단농장이었고
제대군인들과 현지 농민들이
시작했어요
환영사에서 우리에게
"과오를 저지른 동지들"
이라 했어요
그 말에 모두 좀 놀랐어요
란저우에서 우리는
계급의 적이었고
다들 동지라 부르지 않았어요
동지라 안 불러주는 게
너무나 가슴 아팠어요
그래서 농장장의 말에
아주 감격했어요
"과오를 저지른 동지들을
환영한다"는 말에
각자 역량에 맞는
일을 하게 될 것이며
남들처럼 대우 받고
차별을 없을 거랬어요
당시에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란저우에선 계급의 적이지
동지가 아니었어요
반우투쟁이 아직 여기까진
안 미쳤나보다 추측했어요
이곳 사람들에겐 우린 그저
약간의 과오를 저지른 동지였어요
그 뒤로 모두 동지라 불러줬어요
2,3년인가 2년쯤인가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당시의 사회 상황이 그랬어요
정치적 과오를 저질러
당에서 비판 받아도
노동을 통해
자신을 개조할 수 있었어요
노동에 매진해
심신을 단련한다 여겼어요
첫 몇 년 동안 정량 급식했고
배고픈 문제는 없었어요
지도부에선 우파분자에게
교직이나 회계같은
특별한 기술이 있으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일터에 배치했어요
육체적으로는 힘들더라도
정치적으로 차별해
괴롭히진 않았어요
그 농장에서 2년 동안
비교적 즐겁게 지냈어요
1959년 늦여름 국경절을 맞아
농장의 여러 우파들이
복귀됐어요
희망의 빛이 보였어요
근데 갑자기 1959년 말에
모든 우파분자들을
사곡농장으로 옮긴댔어요
그게 진짜 고난의 시작이었어요
4곡농장은 노역 농장이었고
간부와 관리자들이 더 엄했어요
계급 구분을 확실히 했고
우리를 계급의 적으로 봤어요
가서 제대로 먹지도 못 했어요
간부들은 밀가루를 먹으면서
우리에겐 밀겨를 줬어요
옮기고 싶지 않았어요
정치적 비판이 두려웠어요
시부농장에선
감시 없이 지냈어요
일하면서 웃고 이야기했어요
근데 사곡농장에서 일하는
남자 전과자들 때문에 겁이 났어요
관리자들은 문제가 생긴다고
성별로 분리했어요
담당에게
옮기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노동개조로
크게 향상됐다 생각했어요
당시 내 태도가 별난 건 아니었어요
노동으로 자신을 개조하러 왔잖아요
근데 농장장에게 보고했어요
쉬푸이렌이 먼저 옮겨갔어요
가서 만났는데 이렇게 말했어요
"조심해라
리 농장장이 이렇게 말했다
'오지 않으려 했던
여자 우파분자들을
꽉 묶어놓고 다잡겠다' "
다른 선참자에게도 들었어요
꽉 묶어놓고 꼼짝 못 하게 한다고
잔뜩 겁에 집려서
이전 농장으로 되돌려보내달라
요청했어요
그때 같이 왔던 여자들이
쉬티앙아이와 왕구이팡이었어요
들 일 하는 게 더 쉬웠고
정치적인 압박이 심했어요
동료들끼리 서로
말을 못 하게 했어요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못 했고
장부 기계 같았어요
관두라고 할 때까지
계속 일했어요
육체노동은 아니었지만
업무량이 과중했어요
매일 저녁 7시 반부터
자정까지 일했어요
늘 배고팠어요
불 좀 켤까요?
그래요
시력이 점점 나빠졌어요
매일 장부를 보다보니 그랬어요
거기선 새 안경을 구할 수 없어
눈을 가까이 대고 봐야
겨우 읽을 수 있었어요
근시가 심해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때 병원에서 일하던
우샨 출신 전과자를 만났어요
나도 우샨에 탐방 가봐서
이야기를 하게 됐어요
시력 회복에 좋은
간유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구할 수 있냐 물었더니
그렇다며 필요하냐 해서
그렇다고 했어요
작은 병 하나를 줬어요
당시 사정으로는
처방전이 필요했지만
의사가 내줄 것 같지 않아
그냥 받았어요
마시는 걸 누가
못 본 줄 알았는데
며칠 뒤에
재무과장이 불러 말했어요
간유를 받은 게 사실이냐 했어요
그렇다고 했어요
간유를 받는 걸
본 사람이 있댔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게 공짜인 줄 아느냐?
신세졌으니
다른 호의를 바랄 거다"랬어요
참 언짢은 말이었어요
분명히 간유를 받았지만
여전히 급여 받으며 일하고
건강 관리를 받을
자격이 있는데
간유 한 병 갖고 따지잖아요
과장은 사무실에서
봐준 것처럼 이야기 하면서
일장 훈시를 했어요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공책에 그 일을 적어뒀어요
나중에 누가 받는 걸 봤는지
의심이 들었어요
동숙인 중 하나가
밀고했다 생각했어요
농장에서 그런 일이
자주 있었어요
서로 염탐하곤 했어요
사곡농장으로 옮겨온 뒤
지아비앙고에 식량이
부족하다는 걸 알게됐어요
당연히 남편이 걱정됐고
편지를 기다렸어요
2주쯤 뒤에 편지가 왔어요
단 한 장 뿐이었어요
그 전에도...
간단했어요
용수로를 파느라
바쁘다고만 썼어요
월 몇 위안의
식량 보조금을 받는댔어요
근데 월 2통만
서신이 허락된다면서
한 달에 2통 이상은
편지를 보내지 말랬어요
너무 실망했어요
반우투쟁 이후에도
마오 주석이 인민의 공민권을
제한하지 말랬어요
란저우를 떠나기 전에
편지를 마음대로 보내도
좋다고 약속 받았어요
편지만이 서로의 소식을 알리는
통신 수단이었어요
검열관이 남편 편지를
읽는 것 같았어요
편지를 봉하지도 않았어요!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고
알았어요
통신의 자유를 침해했어요
이제 어떻게 사사로운
이야기를 쓰겠어요?
내 편지는 검열되지 않았고
긴 편지를 써서 보냈어요
이쪽 농장이 어떻고
동숙인들이 누구며
어디 출신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 등등
그 뒤론 월 2통만 보내게 됐어요
원래 편지할 때 서로 끝에
이렇게 썼어요
"입맞춤을 보낸다"
남편이 탐방을 나가면
일주일에 한 번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근데 이 편지들은
눈에 띄게 간단했어요
일과 생활 이야기만 했어요
내 편지는 더 길었어요
끝에는 꼭
"입맞춤을 보낸다"고 썼어요
검열관이 보든 말든!
다음 편지가 왔는데 이랬어요
"오늘 급료를 탔는데
매점에 가 과자를 1근 사
그 자리에서 1근을
다 먹어버렸다
몸이 여위어서 안경이 헐겁다"
편지를 보니
굶주리는 게 분명했어요
어릴 때 굶주렸고
중학생 때나 전선에서도
그랬어요
그래도 어릴 땐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어요
학교 친구들과 밭에서
고구마를 서리해 먹었어요
근데 지금은 노동개조 중이라
규율을 어길 수 없었어요
그대로 굶는 수 밖엔
그걸 알기에 너무 가슴 아팠어요
하지만 손 쓸 수가 없었어요
강등된 뒤 급여가 고작
월 58.24위안이었어요
그 중에 35위안을
란저우의 애들에게 보내고 나면
월 20위안 정도만 남았어요
석달에 10위안씩 보내자
결심했어요
매달 3위안 꼴로
그 돈으로 과자라도 사먹게
좀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어요
받는 편지들이 거의 안 봉해졌어요
답장에서 편지를 봉하라고
강조해 썼고
검열관들이 봤을 거예요
그래도 여전히 뜯겨서 왔어요
검열관들은 우리에겐
금쪽 같은 편지인 줄 알면서도
우리를 개만도 못 하게
취급했어요
읽고 나서
봉할 생각도 안 했어요
어떻게 속마음을 말하겠어요?
나는 모든 생활을 썼지만
남편은 고생한다는
말 한마디 못 했어요
뭐라고 했다가
바판에 오른다는 걸
잘 알았어요
사곡농장에 온 뒤로
급식량이 15근으로
줄었다는 걸
편지에 써보냈어요
나보다 사정이
더 어려운 줄 알았지만
중요한 일이었기에
소식을 알려야 했어요
이젠 굶주림과 맞서야 했어요
곧 편지를 못 쓰게 됐고
남편 편지도 끊겼어요
정량이 준 뒤로도
계속 재무과에 있었는데
하루는 간부 장체닌이
내일부터 나오지 말랬어요
이튿날부터 병원으로 가
병동 온돌에
불 때는 일을 하랬어요
농장 한쪽에 지어놓은
임시 병원이었어요
다음 날 아침 먹고
불 때러 갔어요
불이 잘 안 붙을지 몰라
휘발유를 작은 통에 넣어 갔어요
병원에 들어가보니
다섯 칸에 온돌이 다섯이었어요
담요들은 더러웠고
환자들로 꽉 차 있었어요
불쏘시개가 더 필요할 것 같아
낫을 들고 밖에 나가
잡초들을 베어와
온돌마다 불을 붙였어요
병원으로 보내진 게
마음에 들진 않았어요
막 아침 먹었는데
금세 또 배가 고팠어요
그래도 시키니까 해야 했어요
환자들은 다 노동개조 하러 온
남자들이었고
농장의 규칙을 잘 알아
나한테 말 걸거나
뭘 물어보지 않았어요
나는 그냥 불 붙이는 데만
집중했어요
첫 날 그곳에
환자가 아닌
일하는 젊은이들이 있었어요
신문지를 병원의 창에
붙이고 있었어요
근데 남들보다
낯빛이 좋아보였어요
그 중 하나가 바르고 있던
밀가루 풀을 내밀며
좀 먹어보겠느냐 했어요
싫다고 했어요
아무리 굶주려도
풀을 먹을 순 없었어요
그 다음 날
불을 붙이는데
누가 뒤에 와서
여기서 뭐 하냐고 물었어요
이전 농장에서 반장이던
우양샤라는 우파였어요
온돌에 불 때는 일을
맡았다고 했더니
우양샤는 잊지 못 할
말을 했어요
"지금 우리는 모두
생존투쟁 중이다"
그리고 잠시 서 있다 갔어요
내겐 아주 중요한 말이었어요
정말 중요한
그때 생사의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못 했어요
반우파투쟁 당시
분파주의와의 투쟁이니
당을 위한 투쟁이니 했지만
생존투쟁이란 말을
감히 어떻게 하겠어요?
하지만 생각해볼수록
맞는 말 같았어요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어요
목숨이 위태로웠고
살아남기 위해선
살 길을 찾아야 했어요
계속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 밖에 내진 못 했어요
그날 아침 불 때는 일을 마치고
식사하러 숙사에 돌아왔어요
모두 굶주리고 있었지만
들은 말을 동숙인들에게
할 수 없었어요
굶주린다고 불평하는 건
당의 양식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고
죄가 가중 돼요
생존투쟁이란 말을
감히 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속으로는
옳은 말이라 생각했어요
어느 날 밤 동숙인들끼리
이야기를 나눴어요
너무 견디기 힘드니
뭐라도 먹을 길을
찾아야겠다고들 했어요
나는 여전히 우파란
낙인을 걱정해
어리석은 말을 했어요
"규칙을 어겼다간
복권이 막힐 수 있다"고
이 말을 듣고 딴 여자들이
한마디씩 했어요
쉬티앙아이는, "지금 이 지경인데
무슨 복권 걱정이냐?" 했고
쉬푸리안은
"간부들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도
신경도 안 쓴다"했어요
결국 살아남으려면
무슨 수를 써야한다는데
뜻을 모았어요
왕구이팡의 남편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 해
농장을 탈출해
신장에 숨어 있었어요
모두 머리를 짜보자고 했어요
훔치는 게 상책이라는
결론이 나왔어요
나로선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어요!
농장의 간부와 관리인들은
훔치는 게 제일 나쁜
해당 행위라 했어요
남의 양식보다
더 받는 것도 나쁘지만
훔치는 건 훨씬 더 하댔어요
최악이라고
하지만 살기 위해선
훔쳐야 했어요
당시 재무과 뒤에
큰 목화씨 더미가 있었어요
여자들은 나더러 밤에 가
좀 집어오랬어요
내가 재무과에 있었기에
그 주위를 돌아다녀도
이상하게 안 볼 거라면서
양식을 훔치는 것도 아니고
양식 정책을 어기는 게
아니랬어요
작은 목화씨일 뿐이라고
할만한 사람이 나 뿐이라
밤에 몰래가서
큰 손수건에
목화씨를 담아 오랬어요
근데 가보니 더미가
큰 방수포에 싸여 있었어요
겨우 벌어진 틈을 찾아
손수건에 목화씨를
담기 시작했어요
갑자기 외치는 소리가 들렸어요
"거기 누구야?"
돌아봤어요
시부농장에서 알던 간부였어요
꼭 연극 무대에서 하듯
서로를 마주봤어요
고발하지 않을 걸 알았기에
그대로 씨를 담아
숙사로 돌아왔어요
고발하지 않았어요
그 남자도 우파였어요
목화씨를 먹었지만
먹으나마나였어요
씨가 너무 작아 속이 안 찼고
허기에 도움이 안 됐어요
다른 먹을 걸 찾아보자 했어요
씨티앙아이가 말했어요
"목화씨로는 안 되겠다
10월부터 24근이었던 양식을
줄인다고 한다
빨리 먹을 걸 못 찾으면
다 쓰러진다"
그러면서 제분소에서
밀가루를 훔쳤댔어요
호주머니에 좀 집어넣고
숙사로 돌아와
더운 물에 타 마셨다고
목화씨보다야 훨씬 낫댔어요
제분소에서
밀가루를 훔쳐오쟀어요
없는 것보다 낫다고
그 무렵 다른 농장에서
많이들 죽는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곳 병원에서도
몇이 죽는 걸 봤어요
동숙인들에게 말은 안 했지만
아무튼 왕구이팡과 쉬티앙아이가
제분소에서 일했기에
밀가루를 좀 훔쳐오자고
뜻을 모았어요
모두 안 죽고 싶지
누가 죽고 싶겠어요
생존의 문제였어요
쉬티앙아이에겐
어린 딸이 있었고
나도 죽고 싶지 않았어요
가족을 위해 살아야만 했어요
남편의 생사도 몰랐지만
란저우의 아이들과
부모님을 다시 만나
억울하게 몰린 걸 말해야 했어요
우리가 죽으면 누가 말하겠어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어요
근데 어찌어찌 밀가루를 훔쳐도
어떻게 조리하겠어요?
쉬티앙아이가 물만두를
잘 만든댔어요
밀가루만 있으면
물만두를 만든댔어요
근데 어떻게 끓이겠어요?
부침개를 만들자는
말도 나왔지만
우리 숙사 바로 곁에
직공들 공방들이 있어
굽는 냄새를 맡을지 몰랐어요
국수를 만들자고도 했지만
조리할 때 누가 들어오면
그 자리에서 발각나고 말아요
만일 들키게 되면
동숙인들이
제분소에서 쫓겨날테고
그렇게 되면
밀가루를 구할 수 없었어요
생 밀가루를 어떻게 먹을지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어요
결국 해결책을 찾았어요
하루는 일하고 와보니
왕구이팡이 제분소에서
밀가루를 훔쳐왔어요
그날 저녁 식당에서 먹던
국물을 들고와
아직 따뜻한 국물에 밀가루를 섞어
그대로 마셨어요
그 다음부터 그렇게 했어요
여기저기서 밀가루를
조금씩 훔쳤어요
눈치 못 채도록 너무 많지 않게
숙사에 우리만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뜨거운 물에 섞어 마셨어요
그게 잘 통했고
한 시름 놨어요
그 무렵 여전히 아침마다
병원에서 불 때는 일을 했는데
하루는 일하다가
갑자기 식은 땀이 났어요
아무래도 쓰러질 조짐 같았어요
숙사로 돌아와
쉬푸이란에게 이야기했어요
의사가 약을 줬지만 안 들었고
그래서 이야기했어요
하는 말이
"간부와 직공들 대다수가
일하러 안 나온다
왜 우리만 일하느냐"
하면서
하루 쉬자고 했어요
다음 날 쉬푸이란과 둘이
숙사에 남았어요
거기 온 뒤로 하루도 못 쉬어
몹시 지쳤어요
쉬티앙아이와 왕구이팡이
간부들에게 하루 쉴 걸 요청해
침상에서 잤어요
쉬푸이란이
9시 반쯤 깨웠어요
둘이 나가 급식 줄에 섰어요
직공들은 여전히
월 15근 급식이었고
몇 주 일 안 해도
그렇게 나왔어요
차례를 기다렸는데
앞에서 더 타가
뒤에선 반도 안 되기도 했어요
사람들이 굶주려
그런 식으로 됐어요
모자랄까 걱정했는데
정량을 받았어요
모두 국자만 주시했어요!
정량대로 주나 안 주나
죽이 진한지 묽은지
확인하느라 바빴어요
아무 소리 없이
그것만 살펴봤어요
다행히 맨 앞 줄에서
죽을 받았어요
쉬푸이란은 자기 죽이
묽다고 생각했지만
불평할 순 없었어요
숙사로 돌아와
딴 사람들이 오길 기다렸어요
밀가루를 가져 오면
넷으로 나눠서
죽에 섞어 먹었어요
그렇게 먹고 나면
훨씬 나았어요
그나마 그 밀가루 덕에
영양 보충을 했어요
둘이 제분소에서 일해
다행이었어요
모두가 그렇진 못 했어요
그 약간의 훔친 밀가루가
우리 목숨을 살렸을 거예요
그러다...
1960년 12월 20일이었나
월 급식량을
15근에서 24근으로 올려줬어요
우린 최악의 농장들을
해산하기로 한 걸 몰랐어요
란저우에서 열린
서북지역 간부회의에서
남편이 있던 지아비앙고 농장을
1960년 12월에 해산하기로 했어요
그 무렵 지아빙아고는
재난이었어요
우리 농장에서도
사망자가 나왔지만
지아비앙고에
비할 데가 못 됐어요
그래도 우리는 12월 20일부터
월 급식량이 다시
24근이 됐어요
사곡농장에 온 뒤로
지아비앙고에 갈
엄두를 못 냈어요
시부농장보다 사곡농장의
분위기가 훨씬 엄했어요
간부들이 요청을
거부할 거라 생각했어요
또 돈 문제도 있었어요
지아비앙고는 먼데
기차삯이 없었어요
또 우파라고
행동의 자유가 없었어요
보내줄 리 없었어요
행여 허락해도
돈 없이 가 어떻게 돕겠어요?
12월 말에 아버지한테서
편지가 왔어요
남편을 돕고 싶어도
아이들은 어리고
부모님들은 나이 들어
먼 란저우에서 갈 수 없으니
훨씬 가까운 안시에 있는
나더라 가보라 했어요
편지를 당서기에게 보여줬어요
류지귀라는
놀랍게도 당장 가보랬어요
이미 간부들은
위급 상황을 알고 있었어요
부모님들도 당원이 아니라
돌아가는 걸 모르셨어요
곧장 숙사로 돌아와
부모님께 편지를 썼어요
내가 가서 남편을 돕겠다고
필요한 경비를 두보에게
빌려달랬어요
나처럼 강등되어
급여가 삭감됐지만
돈 쓸 데가 많지 않았어요
또 농장 식당에서 일했고
부양가족도 없었어요
가보라는 허락을 받자마자
가서 100위안을 빌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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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ngming - A Chinese Memoir Part II.smi (99.9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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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 전에 눈이 많이 왔는데
트럭 짐칸에 앉아 갔어요
차 좌석엔
식당 취사원의 처가 탔어요
그때 농장엔 서열이 있었고
모두 식당 취사원과
잘 지내려 했어요
그래서 외투를 둘러쓰고
짐칸에 앉았어요
몇 시간 뒤 역에 닿았고
바로 차표를 끊어
기차에 올랐어요
밍수이역에서 내렸는데
1분만 정차했어요
남편에게 줄 음식 보따리와
돈과 양식표가 있었고
혹시 거기 없을 경우
란저우로 돌아가야 해서
옷 보따리도 있었어요
밍수이역은 승강장도 없이
아주 작은 역이었고
짐 챙겨 기차에서 내렸을 땐
벌써 캄캄했어요
역 근처의 인가로 가서
농장 가는 길을 물었어요
남자가 눈에 덮힌
작은 길을 가리키며
서쪽으로 가다보면
농장이 나온댔어요
밖은 아주 캄캄했고
눈에 덮힌 길엔 나 뿐이었어요
기차에서 나만 내렸어요
역을 나오면서부터
아무도 못 만났어요
인적이 끊긴 작은 눈길을
10리는 걸어야 했어요
짐이 무거웠지만
한가지만 생각했어요
내가 와서 구해주기를
남편이 기다린다고
위급한 지경일지도 몰라
쉬지 않고 계속 걸었어요
그러다 보리수 숲까지 왔는데
길이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짐을 내려놓고 주변을 살폈어요
눈으로 덮힌 길 위엔
사람이라곤 안 보였어요
뒷날 가오지에를 만났는데
농장에서 탈출한 이야기
"도망"을 쓴 사람이었어요
나더러 이리와 안 마주친 게
천운이랬어요
그날 밤 이리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남편을 구하러 가야 했어요
날 기다리고 있었어요
숨이 붙어 있을 동안
가기만 하면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이리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어요
남편을 구하려는 일념 뿐이었어요
가오는 책에서 자기 스승이
이리에게 잡혀먹혔댔어요
그러면서 내가 천운으로
이리와 안 마주쳤댔어요
난 생각도 못 했어요
농장에서 알게된 펭쉬웨이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현에서 식자재를 사오다가
이리떼에게 쫓겼대요
소달구지를 계속 따라왔대요
빨리 가면 빠르게
늦게 가면 느리게
그 이야기를 들었지만
내 생사는 염두에 없었어요
날 기다리는 남편만 생각했어요
길을 잃고 주위를 살펴보니
한쪽으로 길 같은 게
나 있어서
짐을 들고 계속 걸었어요
좀 뒤에 사람을 만났어요
농장 가는 길을 물었더니
저 앞에 보이는 불빛이
농장 사무소랬어요
길에만 신경 쓰다보니
불빛을 미처 못 봤어요
농장에 가족을 찾아온
사람 같았어요
근데 가족을 찾지 못 하고
돌아가는 길이었을 거예요
간부가 아니라
밤길을 나섰을 거고
불빛을 따라 사무소에 갔어요
안에 들어가니
두 남자가 앉아 있었어요
왕징차오를 찾아 왔다 했어요
두꺼운 장부를 꺼내더니
넘겨보기 시작했어요
농장이 아주 큰 거 같았어요
소속을 찾는데 한참 걸렸어요
마침내 찾아냈어요
왕징차오는 12월 13일
죽었다고 했어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어요
구하려는 일념으로 달려왔는데
죽고 말았다니!
나무 의자에 주저앉았어요
사무실엔 가구가 별로 없었어요
처음엔 충격에 빠졌어요
울음도 안 나왔어요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갔어요
남편은 이제 여기 없구나
이 세상을 떠났구나
영영 가버렸구나
울음이 터져나왔어요
두 간부는 못 본 척하며
일만 계속했어요
위로 한 마디 하지 않았어요
사별하는 가족들을 하도 봐서
그렇게 대하는 게
습관이 됐나봐요
얼마를 울었는 지
우파 한 사람을 부르더니
잘 곳을 마련해주라 했어요
함께 사무소를 나왔어요
캄캄한 밤이었어요
한참 걸어 데려간 게
땅굴 같은 곳이었어요
사무소엔 석유등이 있었지만
이 굴 속에선
잉크병을 등으로 썼어요
우리 농장과 같았어요
큰 굴이었고
나무 판자와 천으로
주위를 둘렀어요
굴 뒤로 데려가
이불 두 벌을 주면서
밤에 추우면 덮으랬어요
좀 뒤에 또 한 우파 남자가
들어왔어요
굴 안에 간이 벽돌 화로와
불쏘시개가 있었어요
그 위에 냄비 물을 끓이고
쌀국수를 삶았어요
한 남자가 말했어요
우한의 고모가 보낸 거라고
배고프냐고 물어
그렇다고 했어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못 먹었어요
선심 쓰는 게 고마웠어요
사무소의 간부들은
식사 배려따윈 없었어요
무관심했고 상관 안 했어요
같이 먹자고 해서
좋다고 했어요
하루 종일 굶어 정말 배고팠어요
여유가 없는 줄 알기에
조금만 먹었어요
그 사람들에겐
국수를 나눠주는 게
아주 큰일이었어요
그래서 조금만 먹었어요
들고온 꽃빵을 좀 나눠줬어요
정말 맛있다며 먹었어요
그때 우리 급식량은 30근이었고
간부들처럼
꽃빵을 만들어 먹었어요
먹고 나서 두 사람은
곧 잠자리에 들었어요
둘은 굴 저 끝에
나는 맞은 편 끝에 있었어요
편한 데 잠자리를 펴랬어요
둘은 이부자리에 누웠지만
나는 불편했어요
그땐 아직 젊은 여자였고
낯선 남자 둘과 굴에서
어떻게 잠이 오겠어요?
어찌할 줄 모르고 앉아 있었어요
날 데려왔던 이가
눈치챘는지 말했어요
"걱정 말고 푹 쉬어라
괜찮다"
너무 늦었고
어쩔 수 없다 생각했어요
건네 받은 이부자리를 폈어요
이 안에서 죽은 사람 게
분명했어요
굴은 거의 비었는데
이부자리는 꽉 차 있었어요
이부자리를 펴고 외투를 덮었어요
굴 천장을 판지와 나뭇가지로
덮어놨는데
그 틈새로 별이 보였어요
또 그 틈새로 바람이 새들었어요
그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어요
긴 여행에 피로했고
한참 울고난 뒤였지만
계속 잠을 설쳤어요
누워서 천장의 별을 보며
생각했어요
이 굴에서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어요
여전히 여기 있을 거다
혼령이 여길 못 떠날 거다
굴의 틈새로
들여다 보고 있을 거다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억울한 이 고혼들은...
이승을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세상에서 배척당했어요
지금 어둠 속을 떠돌며
가고 싶지 않아 했어요
서둘러 저승길로
떠나고 싶지 않아 했어요
아직 이승에 미련이 있었어요
하지만 세상은 이미
등을 돌렸어요
가까운 사람들과 영영
떨어지게 됐어요
이 세상에서 이런저런
꿈이 있었어요
이제 그런 꿈은...
잊혀지게 됐어요
물론 남편 생각도 했어요
자신을 개조해서
인민의 품 속으로
돌아오려 했어요
다시 글을 쓰면서
새출발하려 했는데
영영 가버렸어요
이젠 다시 볼 수 없었어요
혹독했던 비판회 시절이
떠올랐어요
나를 껴안아주며
다정하게
'예쁜 자오 자오'라 했어요
남편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어요
우리의 심장이 함께 뛰었어요
이제 그 심장이
뛰는 걸 멈추고 말았어요
그 소리를 다신
들을 수 없었어요
나와 애들만 고난 속에 남겨두고
떠났어요
난 여전히 우파분자였어요
남편을 잃고
변함없이 우파였어요
어찌 살아갈지 몰랐어요
혼자 그 짐을 견딜 수 없었어요
힘 없고 약한 우파분자가
어떻게 혼자 두 아이를
키우겠어요?
란저우에서 남편이 인용했던
"전쟁과 평화"의
한 귀절이 떠올랐어요
"살아 있어 행복하다"
이젠 이 세상에서 사라졌어요
그 행복...
모두가 누릴 그 행복을
이젠 알지 못 했어요
남편이 저 위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날 밤을 어떻게 났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잤다 깼다 계속 뒤척였어요
그러다 마침내 날이 밝았어요
이튿날 아침
한 남자는 일찍 나갔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남은 남자한테 말했어요
왕징차오의 무덤에 가겠다고
간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댔어요
나갔다 오더니
무덤이 멀리 떨어져 있고
잘 묻어줬으니 걱정 말랬어요
아무리 멀어도 좋다고 했더니
그래도 가지 말랬어요
그래서 의심이 들었어요
우리 농장에서도 많이 죽었고
급하게 묻었어요
무덤을 못 찾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낯선 사람 묘에 가서
곡 하고...
절하겠어요?
놔두라고 했어요
무덤을 못 찾는다면
아무 소용 없었어요
그날 밤 다른
새 굴로 옮기게 했어요
안에 세 사람이 있었어요
텐수이에서 온 남매는
페이지펑의 자식들이었어요
또 한 명은
우체국 여직원이었어요
페이지펑은 전직 교사로
농장에서 죽었어요
우체국 여직원의 남편도 그랬고
나는 기자였고
역시 남편이 죽었다 했어요
그 뒤론 서로 별 말 없이...
그냥 울기만 했어요
다른 할 말이 뭐 있겠어요?
그 동굴도 고인들의 이부자리가
여기저기 널렸어요
이불에 싸서 묻거나
그마저 안 한 사람들도 있어
그렇게 남았을 거예요
그날 밤 그 이부자리에서 잤어요
다른 굴에도 우리 같은
과부와 고아들이 있고
농장의 생존자들도 있었겠지만
아무도 못 만났어요
간부들은 자기 일만 끝내고
신경도 안 썼어요
오기 전에 불상사에 대비했어요
혹시 남편이 죽었을 경우
란저우로 가게 돼 있었어요
란저우를 떠날 때
큰아들이 7살
작은아들이 4살이었고
오랫 동안 보지 못 했어요
이제 관할에서 벗어나
란저우로 가도 됐어요
그땐 차표 구하기가 힘들어
간부에게 표를 부탁했어요
좋다고 했어요
몇 시간 뒤 돌아오더니
표를 안 산도 된댔어요
상부에서 새 지시가 내려왔대요
농장의 수용자를
모두 집에 돌려보내라고
그날 오후에 기차가 출발한댔어요
그래서 모두 표를 안 사고
돌아가게 됐어요
그날 란저우로 떠났어요
밍수이가 아닌
가오타이 역에서 출발했어요
밍수이에선
기차가 1분만 정차했고
승강장도 없었어요
그때 만난 게 왕치였어요
짐이 많아 도와줄 사람을
농장에 부탁했더니
왕치를 보내줬어요
역에 가보니 피난민들처럼
서로 밀면서 기차에 타려 했어요
왕치는 뒤에 남아야 했고
남은 꽃빵을 줬더니
뒷날 그걸 기억했어요
징차오는 모른댔어요
나중에 기차 안에서 누가 와
왕징차오의 처냐 물었어요
내가 온 줄 알았지만
만나지 못 하게 했대요
그 사람이 주천셩이었어요
38사단의 고참 간부였는데
젊은 여자와 동거해
사생아를 낳아
군직에서 쫓겨나
노동교양을 받게 됐어요
왕징차오를 잘 안다면서
의젓한 사람이라 모두 존경했대요
아직 상중이라
긴 이야기는 못 나눴어요
먼 길이었는데
기차가 아주 느렸어요
거기다 먹을 걸 주지 않았어요
우리 몫의 빵이 없었어요
빵을 제공한다 해놓고
하지 않았어요
가져온 음식은 벌써 다 먹었어요
옆에 한 농민이 앉았는데
볶은 밀가루가 있었어요
돈과 양식표를 좀 주고
반사발과 바꿨어요
그것만 먹었어요
딴 사람들은
어떻게 했는지 몰라요
가는 내내 속였어요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거의 다 왔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제 거의 다 왔다"면서
란저우에 다 왔을 땐
먹을 게 다 떨어졌고
받은 게 없었어요
집에 가면
먹긴 하겠지 생각했어요
란저우도 기근인 걸 몰랐어요
내가 없는 동안
란저우 사람들도 굶주렸어요
그때 여동생이 둘이었는데
하나는 소학교
또 하나는 중학교에 다녔어요
둘이 일요일에 힘든 일을 했대요
멀리까지 가 당근 잎을 모아왔대요
당근 잎은 전에 안 먹었어요
농민들이 남겨둔
당근 잎을 모아
자루에 담아 집에 가져왔대요
전엔 입에도 안 댔어요
여동생과 내 아들들이
란저우에서 굶주리고 있었어요
집에 들어서는데
나 혼자인 걸 보고
다 눈치챘어요
겨울방학이라
여동생들도 집에 있었어요
아버지는 상황이 그렇게
나쁜 줄 모르셨어요
겨울방학이 되면 여동생들을
남편에게 보낼 생각도 하셨어요
하지만 내가 갔을 땐
죽은 지 한 달 지났어요
그래도
집에 오니
마음이 놓이고 속 편했어요
큰일 치루고 왔어요
그 뒤 신문사로 돌아가
한동안 잡일을 했어요
그러다 1961년 9월 하순에
전체간부회의에서 갑자기
우파들을 복권시킨다
선포했어요
그토록 기다렸던 날이었지만
왕징차오를 비롯해
죽은 사람들을
사후 복권시킨다는 소식에
울음만 나왔어요
이제 와 무슨 소용예요?
다 가고 없는데!
나는 살아남았고
아들에게 돌아왔어도
깨어진 가족이었어요
신문사에서 작은 집을 내줘
아들들과 옮겼어요
복권된 뒤로는
62년부터
자료실에서 일하게 됐어요
당시 58.24위안으론
세 식구가 살기 쉽지 않았어요
여전히 배가 고팠고
62년에도 식량이 부족했어요
그래도 셋이 근근히 지냈어요
문화혁명 중에
또 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아직 안 한 이야기예요
다시 우파분자로 낙인 찍혔어요
1969년 3월
그때 신문사를 극좌파인
군이 운영했는데
6, 70명을 감금하고
1명을 체포했어요
나는 태도가 불손하다고
중징계를 받았어요
우파분자로 낙인 찍혀
공직에서 쫓겨나고
노동개조를 하게 했어요
후이닝으로 보냈는데
아버지 고향이지만
가본 적도 없었어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우리 집안이 지주 성분이랬어요
집안이 땅을 가진 적 없다고
써냈는데도
우린 노동자 성분이었어요
아버지 고향인 후이닝에 관해
많이 물었어요
고향에서 제일 가까운 인민공사
이름도 몰랐어요!
수십년이 흘렀는데
어찌 알겠어요?
깐거우란 곳을 물었어요
어릴 때 아버지한테
들어봤다 했어요
그때부터 친가의 친척들한테
연락을 보냈어요
그러다 4월 초에
후이닝으로 노동개조를 보냈어요
도착하던 날
큰 눈보라가 몰아쳤어요
후이닝 출신의 왕수란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어요
"두 손이 있는데
왜 도시에서 빈둥거리나"
이 말을 듣고 전국적으로
도시의 실업자들을
농촌으로 보내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4월 초에 후이닝에 갔는데
그때 이미 큰아들은
농촌으로 간 뒤고
작은아들은 중학교에 다녔어요
원래는 나와 함깨 보내려 했어요
나는 파직 되고
걔를 누가 돌봐줘야 했어요
근데 애가 영리했어요
농촌에 가면 힘들다는 걸 알고
'노동선전대' 선생에게 물어봤어요
선생은 바라지 않으면
안 가도 된다 했어요
그래서 주소를
어머니 집으로 옮기고
란저우에 남도록 했어요
학교에선 내가 가는 걸 돕게
며칠 쉬게 했어요
후이닝엔 아버지의 이복형제들인
숙부들이 있었어요
한 아버지에 어머니가 달랐어요
그쪽이 후이닝으로 옮긴 건...
이야기가 좀 복잡해요
할아버지한테
본처와 후실이 있었어요
아버지는 본처 소생이고
숙부들은 후실 소생이었어요
할아버지가 1947년에
돌아가시자
후실은 란저우를 떠났어요
그때 후이닝으로 가서
2,30묘의 땅을 빌렸어요
나중에 그 작은 땅 때문에
지주 성분이 됐고
온 가족이 지주 성분으로
분류됐어요
지주라고는 하나
숙부들은 몹시 가난했어요
내가 갔을 때 서류에는
숙부 집에 있게 돼 있었어요
"편의 제공"이라고
늘 쓰는 말 있잖아요
근데 가보니
내게 내 줄 방이 없었어요
큰 숙부래봐야 7,8살 위였어요
처와 애들 너댓이 있었고
온 식구가 한 방을 쓰고
큰 침상에서 함께 잤어요
다른 숙부들은 더 해서
토굴집 같은 데 살았어요
방 내줄 형편이 못 됐어요
또 숙부들은
내가 우파라는 걸 알았는데
가뜩이나 지주 성분이라
압박이 심했어요
나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집이 너무 작고
또 아무래도
'한솥밥'을 안 먹는 게 낫겠다"
그 말 뜻 알아요?
같이 지내게 되면
더 눈총 받는다는 거였어요
지주가 아닌 집이 좋겠으니
그렇게 하랬어요
그때 동행했던 간부가
장씨 성으로 좋은 사람이었어요
아직 마을에 있었고
지방 간부 집에 묵고 있었어요
숙부는 가기 전에 빨리 붙잡아
다른 지낼 곳을 부탁해보랬어요
숙부는 지방 간부의 집으로
나를 데려갔고
장씨 간부한테 사정을 말했어요
숙부 집에 지낼 방이 없다고 했어요
사정을 이해했어요
지낼 방도 없고
가져온 물건을 둘 데도
없다고 했어요
그때 가져온 게
한 차 분은 되는데
어디 둘 데가 없었어요
간부는 생각해보자며
우리를 돌려보냈고
그날 밤은 숙부 집에서 잤어요
이튿날 간부가
한 농민 집에서 받아주겠다니
그리 가랬어요
그날 작은 숙부들이
짐 옮기는 걸 도왔어요
농민의 성은 왕씨고
빈농 성분이었어요
숙부는 그 말을 듣고
왕씨가 사람 좋고
잘 해줄 거랬어요
그렇게 손수레에 짐을 싣고
농민의 집으로 갔어요
농민의 집은 둥근 움집이었어요
움집이 뭔지 알아요?
네, 둥근 흙 굴집인데
처음 봤어요
진흙 벽을 세워놓고
가난해서 서까래나 기와를
올릴 여유가 없어
천장을 흙벽돌로 둥글게 해놨어요
거기 빈 방이 있어
그리 짐을 옮겼어요
취사도 됐어요
방의 폭이 2,3미터 됐고
길이가 6,7미터에
온돌이 있었어요
취사용 쇠냄비를 가져갔어요
농촌에선 큰 냄비를 쓰는데
내 건 좀 더 작았어요
숙부가 방 구석에
작은 화덕을 만들어줘
취사할 수 있었어요
다음에 불쏘시개로 불을 피워
냄비에 물을 끓이게 했어요
집에서 보온병을 가져와
늘 더운 물을 먹게 됐어요
왕씨 농민이 진짜 잘 해줬어요
사실 아주 먼 친척 관계였어요
그 집 할아버지는 자기를
왕 할아버지라 부르랬어요
촌수가 어찌 되는지는 잘 몰라도
나를 한 집안 사람처럼 대했어요
그때 난 30대였는데
50대 부부를
왕 어머니, 왕 아버지라 불렀어요
그땐 아직 호구에 안 올라
양식표를 받지 못 해
첫 날 저녁을
그 집 식구와 같이 먹었어요
메밀국수와
집에서 담근 짠지였어요
말했듯이
아주 먼 친척 간이라 했고
한 숙부와 잘 아는 사이였어요
그날 밤 왕 어머니 말이
그 빈 방을 오래 안 썼는데
온돌을 데워놨댔어요
그날 밤 따뜻하게 잤어요
저녁 먹고 바로 잠들었어요
이튿날 아침 일어나...
양식표를 신청하러
공사 사무소로 갔어요
사무소가 십리 길이었고
절차 밟을 게 많아
그날은 일 안 했어요
양식표가 나왔는데
한달 치 밀가루였고
부근에서 밀가루룰 타
따로 취사하게 됐어요
또 왕 아버지 말대로
버들 망태기를 샀어요
등에 메고 다니는 망태기였어요
농촌에선 누구나
이 망태기를 썼어요
거름 나르는 일 할 때 썼고
또 불쏘시개를 모으고
땔감인 당나귀와 말 똥을
주워왔어요
사흘 째부터 일했는데
거름을 날랐어요
생산대장이 사람들에게
이미 내 이야기를 해놨어요
란저우에서 온 우파분자라고
농민들은 별로 개의치 않았어요
대장은 문혁을 내세워
위세부리는 인물이었어요
함께 일하는 여자들은
친절하고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물어봤어요
처음엔 대장과 함께 일했는데
망태기에 너무 무겁게 지운다고
딴 여자들이 말했어요
자기들과 같이 하면
일이 훨씬 편할 거랬어요
빨리 해야 하고 쉴 틈 없던
농장과는 달랐어요
농민들이 말했어요
"공동의 일이니 슬슬 하라"고
그게 그랬어요
혼자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돌아가는 건 같았어요
농장 일보다 수월했어요
대장은 언제든
작업을 중단시키고
남자들과 나무 판에 흙 말로
장기를 뒀어요
자신은 일하는 시늉만 했어요
이 번이 두 번째라
복권될 기회가
없으리라 생각했어요
생산대의 농민들은
나를 남처럼 대하지 않았어요
한 번은 대장이 없는 틈에
빈둥대고 있었는데
누가 말했어요, "장 대장 온다
뭐랄지 모르니 조심해라"
자기들은 별 상관 없지만
내가 걸리면
문책 받는 걸 알았어요
농민들은 날 봐주고
가족처럼 대했어요
온 직후에 왕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우파분자라고
날 따돌리면 안 된다고
무슨 분자니 하는 식으로
사람을 대하지 말고
손님으로 한 가족으로 대하랬어요
첫 날 온돌에
어떻게 불 피울지 몰랐는데
불 피우는 걸 도와주고
보살펴줬어요
매일 왕 어머니는 문 앞에
불쏘시개를 놔뒀어요
늘 딸처럼 대하며 살펴줘서
따뜻한 온돌에서 잠들었어요
농장에서 오래 춥게 지냈던지라
여기가 별천지 같았고
큰 자유를 찾은 기분이었어요
그래도 농촌 생활은 힘들었고
우물도 없었어요
빗물을 받아놓고 썼어요
세수할 땐
물을 조금 떠서
문지르면 그만이었어요
근데 특별히 나한테는
대야를 쓰게 해줬어요
나한테 잘 해줬어요
근데 한 달이 지나고
점점 힘든 일이 생겼어요
타온 밀가루를 다 먹고
밀을 갈아야 했어요
그때 거긴 맷돌질 할
연장이나 당나귀가 없었어요
당나귀는 공공 재산이었고
손으로 갈아야 했어요
밀을 까부르는 건
남들이 도와줬지만
가는 건 본인이 해야 했어요
그게 힘들었어요
익숙하지 않아서
힘든 일은 아닌데
웬지 어지러웠어요
하루는 하다가 갑자기 땀이 났어요
왕 어머니가 왜 그러냐 물었어요
"왜 그렇게 땀 흘리느냐?
안색이 안 좋다"며
어지럽다고 했어요
웬지 갈다보면 어지럽다고
앉아 있으라고 하더니
대신 일을 해줬어요
이전의 농장 일은 힘들었어도
몸에 밴 일이었어요
이 일은 더 쉬운데
웬지 잘 안 됐어요
어째야 할지 몹시 걱정했어요
조금도 못 갈았어요!
그 가족이 다시 해결해줬어요
당나귀가 있는 산의 농가를
왕 어머니가 알았어요
그 집에 말해서
당나귀를 빌려왔고
그렇게 밀을 갈 수 있었어요
나한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늘 나서서 도와줬어요
그 뒤론 손으로
밀을 갈지 않았어요
내가 간 첫 해는
후이닝에 비가 많이 와
풍년이었어요
그땐 아직 젊고 건강해
일 많이 했어요
그해에 양식을 충분히 받아
이듬해까지 먹고 지냈어요
근데 3년째에 가뭄으로
양식이 모자랐어요
후이닝에선 낫으로
밀을 베지 않았어요
잡아 뽑았어요
농장에선 낫을 썼지
손으로 해본 적이 없었어요
하루는 밭일을 나갔는데
뽑다가 손에 물집이 잡혔어요
왕 어머니가 보고 말했어요
"그 손으로 내일
어떻게 일하겠느냐?"
낫만 써봤다고 했더니
"진작 말하지
낫을 빌려주마" 했어요
밀의 키가 낮아
쭈그려 앉아야 했어요
근데 농촌 여자들은 전족을 해
앉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무릎 꿇고 일했어요
다들 집에서 만든
무릎받침을 썼어요
왕 어머니는 나이 들어
밭일을 못 해
자기 무릎받침과 낫을 빌려줬어요
농장 일처럼 힘들진 않았어요
공사의 사람들은
내게 잘 해줬어요
계급의 적이 아니라
인간답게 대했어요
가뭄이 들고
먹을 게 부족했어요
힘든 시절이었어요
개에게 줄 물도 없었어요
다들 강물을 먹으라고
밤에 개들을 풀어놨어요
강물이 탁했지만
사람 먹을 물도 모자라
개들을 풀어놨어요
첫 해 겨울에
감자를 많이 수확했어요
몇백근 됐어요
그 감자를 광에 저장해놓고
요긴하게 먹었어요
감자 가루로 국수도 해먹었어요
지금도 감자를 안 먹어요
그때 하도 물려서!
가뭄으로 농민들은 굶주렸어요
나는 집에서 보낸
양식표로 지냈어요
농민들은 말이 아니었고
개들도 굶어 죽었어요
대장은 양식을 훔쳤어요
농민들은 굶는데
훔친 걸로
자기 돼지들을 살찌운다는
말이 나돌았어요
그 집 식구들은
쉬운 일만 하면서도
남들 몫과 똑같이 받았어요
양식을 훔쳐 굶주리지 않았어요
그무렵 계급투쟁이 격화됐고
린뱌오가 지시를 내렸어요
몇 호 지시인지는
잘 기억 안 나지만
도시인들을 농촌에
내려보내란 것이었어요
똑똑히 기억은 안 나도
그랬어요
란저우에서 상당수가 왔어요
대장이 일장훈시를 했어요
"지금은 전시와 같다
우파분자들의 행동에 따라
즉걸처분해
총살시켜도 무방하다"
근데 1972년에
문화대혁명 대상자를
다시 선별했어요
많은 신문 사원들을 체포해
농촌으로 보냈고
나같은 우파분자들을
반혁명분자, 파괴분자로
처리했어요
절도로 비판받은 이가 있었는데
처가 일이 없고
살기가 곤궁했어요
뭐랬냐 하면...
석탄인가를 훔쳤다 했어요
석탄 조금 훔쳤다고
파괴분자라며 농촌에 보냈어요
당시엔 이중으로 처벌 받았어요
당에서 제명 당하고
공직에서 쫓겨났어요
그때 란저우의 친척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란저우로 돌아와
재심사를 받아보라고
어떻게 그렇게 해요?
근데 여동생이 전보를 보냈어요
작은아들이 폐렴이니
돌아오라고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근데 간부는 전보가
공식적이 아니랬어요
그 전보로는
공식 증명이 안 된다면서
여동생은 작은 공장에 다녔고
상사와 사이가 좋았어요
그래서 다시 전보를 보냈어요
공장의 직인을 찍어서
다시 요청했더니
란저우로 돌아가도 좋댔어요
물론 내 본뜻은
재심사 받는 것이었어요
당시 란저우에선
호구조사가 엄격했어요
아들과 어머니 집에 있었는데
한밤중에 검사관들이 찾아와
호구조사를 했어요
그 중 하나가 친척이었어요
날 알면서도 몇 가지 묻곤
눈을 찡끗하더니
별다른 조사 없이 나갔어요
그 뒤 여동생 숙사로 갔어요
직원 숙사고 조사가 없었어요
여동생은 갓난애가 있어
도움이 필요했어요
애 돌보고 가사 일 하는
집안 일을 봐주면서
재심사 소식을 기다렸어요
신문사를 군이 관리하고 있어
처리가 더디게 진행됐어요
냉담한 태도였고
호의라곤 없었어요
모든 서류가 공안국을 거쳤어요
공안국을 거쳐야
일이 진행됐어요
처음엔 공안국에서
복직 신청을 거부하고
후이닝으로 돌아가랬어요
다행히 사촌의 남편이
공안국에서 일했어요
공안국에서 근무한 지
얼마 안 됐지만
상사가 힘이 좀 있었어요
그렇게 뒷 경로를 통해
마침내 재심을 받아들여
신문사에 복직했어요
1972년 4월에
란저우로 돌아왔지만
1974년 8월이 되어서야
신문사에 복직할 수 있었어요
근데 오래 못 있을 거 같았어요
정치적 압박감이 심했어요
막 복직한 우파분자라고
보는 눈이 곱지 않았어요
란저우에서 딴 일을
찾아보려 했어요
그때 어머니는 60대였고
건강이 안 좋으셨어요
여동생은 수력발전설계를
전공했는데
문화혁명을 겪으면서
공장 일을 하게 됐어요
어린아이들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병으로
육아나 가사 일을 못 도왔어요
내가 자료과에서 일하며
늦게 돌아가는 게
어머니한테 안 좋았어요
그래서 란저우에서 이직을 하고
집안 일을 도울 생각이었어요
그때 란저우는 문화혁명으로
교사가 부족했어요
특히 중학교 교사가 그랬어요
신문사에 내가 심장병이 있고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신문사를 관두고
교사로 일하고 싶댔어요
어차피 날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근데 최후 통지를 해왔어요
간난으로 가라고
석 달 안에 안 가면
일자리가 없댔어요
복직한 지 얼마 안 되는데
뭐라 따지겠어요?
간신히 복직했는데
다시 잃을 순 없었어요
결국은 하는 수 없이
간난으로 가야 했어요
다른 이유도 있었어요
그때 재혼했는데
두 번째 남편이 간난에 있었어요
서북민족학원에서 일했는데
그 조직을 해체시키고
상당수의 인원을
간난으로 보냈어요
간난은 추운 고산지대였어요
해발 2천9백미터였어요
딴 데면 어머니를
모시고 가겠는데
고산지대라
어머니 건강에 더 안 좋았어요
옮겨야 했지만
한참을 미루다가
1975년 4월에 갔어요
나한테는 말 안 하셨지만
어머니가 친구분들에게 그러셨대요
"펭민이 가면
난 오래 못 산다"라고
어머니가 계신 집엔
화장실이 없었어요
내가 가면 손주 둘 뿐이었어요
용변을 보려면
제일 가까운 공중 화장실이
7, 8미터 거리였어요
이미 한 눈을 실명하셨고
다른 눈도 잘 안 보였어요
더는 자신을 돌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가면
오래 못 산다셨어요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간난에 가서
뭘 하겠냐 물어
중학교 국어 교사를
하겠다고 했어요
고졸 출신이라고
이력에 나와 있었지만
할 수 있다고 했어요
당시 신설된 간난 민족학교에
국어 교사로 보내줬어요
그때 여동생 편지가 왔어요
어머니가 몹시 아프다고
답장을 썼어요
치료 해보고
그래도 호전 안 되면
전보를 보내라고
일주일도 안 돼 전보가 왔어요
내 답장을 받기도 전이었는데
빨리 집에 오라 했어요
학교 동료들이
수상하게 생각했을 거예요
이제 막 와선
집에 가보겠다 했으니
집에 와보니 병이 위중했어요
어머니가 걷지를 못 하셔서
제부가 병원에 모시고 갔어요
근데 병원에선 죽어간다고
안 받아줬어요
난 우파분자에
여동생은 공장 직원
제부는 하방돼 온 처지였어요
아무 힘이 없었어요
결국 간신히 한의원에 모셔갔어요
망막출혈이 뇌에 이르렀고
지나치게 신경 쓴 게
병이 된 것 같으며
치료가 안 된다 했어요
내가 가면 오래 못 사실 걸
어머니는 아셨어요
나중에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간쑤일보가 내 가족 둘을 죽였다
처음엔 남편, 다음엔 어머니
날 안 보냈으면
그렇게 빨리 안 돌아가셨어요
그때 나한테는 아직
수업이 배정 안 됐어요
한 여동생은 공장에 휴가낼
형편이 못 됐어요
또 한 여동생은 애가 둘인데
걸음마 하는 애와 갓난애였어요
내가 휴직계를 내고
어머니를 돌봤어요
두세 달 뒤에
어머니는 긴 병환 끝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뤘어요
나와 작은여동생 둘 뿐이었어요
동생은 며칠 휴가를 냈어요
큰여동생은 못 왔어요
나중에 겨울 휴가 때
여동생들이 집에 왔고
어머니 묘에 작은 묘비를 세웠어요
1978년 12월에 마침내
나는 정치적으로 복권됐어요
왕징차오는 간쑤일보의
우파 우두머리라며
1979년에야 복권됐어요
결국 신문사의 우파 11명이
모두 복권됐어요
그 뒤...
79년에 민족학원으로 옮겼어요
1990년에 비로소
농장에서 같이 고생했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했어요
그 중에 가오타이에 사는
사오종화라고 있었어요
편지를 보냈더니
바로 답장이 왔어요
이렇게 썼어요
"지금 가오타이에 사는데
남편이 있었던 농장과 멀지 않다
남편이 밍수이에서
죽은 건 알지만
남편 이름은 몰랐다
남편의 묘를 찾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편지를 받기 전까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묘 찾는 걸 돕고 싶다"
그 동안 나도
같은 소망을 품고 있었어요
1961년 농장에서 나올 때
간부들이 거짓말 했어요
남편의 묘를 찾지 못 해
고별의 예를 갖추지 못 했어요
수십년 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어요
마침내 1991년
큰아들 파샤와 함께
가오타이로 가서
애아버지 묘를 찾아
제사를 올리게 됐어요
당시 그곳엔
묘지로 길이 안 나 있었는데
그곳 지리를 잘 아는 사오종화가
자전거로 안내했어요
아들 파샤는 자전거를 빌렸고
나는 샤오종화의 자전거
뒤에 타고 갔어요
30여년이 흘렀지만
남편이 묻힌 곳을
찾아내기를 바랐어요
묘를 찾는 가족들을 위해
농장의 간부들이
고인의 묘 위에
이름이 적힌 돌을 놔뒀어요
검정 잉크나 붉은 물감으로
써놨어요
글씨가 안 지워지도록
돌을 엎어놨어요
널린 무덤들을 보며
아주 비통했어요
그 동안 과연 남편 무덤을
찾을 수 있을지 몰랐어요
여기서 나올 때
애들은 아기였어요
이제 다 큰 아들을 데리고
그애 아버지가 묻힌 곳에 왔어요
묘지에 들어서면서부터
울음이 터져나왔어요
아주 큰 묘지에
무덤들이 꽉 차 있었고
이 무덤 저 무덤을 다니면서
돌을 다 뒤집어봤지만
이름이 다 지워졌어요
샤오종화가 1979년에 왔을 땐
아직 이름이 보였다고 했어요
이젠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어요
셋이 모든 무덤을 돌아다니며
돌을 집어 이름을 살펴봤지만
남편 무덤을 찾을 수 없었어요
모든 무덤이 같았어요
이름이 다 지워졌어요
결국 묘지의 한 공터에서
제물을 올렸어요
샤오종화가 현지에서
복숭아와 과일을 사왔고
우리는 란저우에서
대련을 가져왔어요
내가 써온 "수조가두"와
함께 고난을 겪은
양캉과 두버지의 추도문이었어요
파샤가 대련을 읽기 전에
아버지라 외쳤어요
30년만에 처음이었어요
아버지라 불러보질 못 했어요
말을 배우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었어요
처음으로 아버지라
부르는 걸 듣고
너무나 감격스러웠어요
그애가 대련을 읽고서
모두 통곡했어요
그날 날씨는 좀 흐렸어요
묘지는 아주 조용했어요
새 소리나 벌레 소리도
없었어요
그 정적 속에서
아들의 대련을 태우고
무덤에 엎드려 흐느꼈어요
다음엔 내가 써온
"수조가두"를 읽었는데
계속 목이 메었어요
내 생각을 담아온 것이라
끝까지 읽어야 했어요
가까스로 읽기를 마쳤어요
그리고 샤오종화가
두버지와 양캉의
추도문을 읽었어요
남편이 핍박을 받게된
세 편의 글이
후세에 남을 것이며
고이 잠들기를 빌었어요
다음엔 현지 풍습에 따라
종이를 불태웠어요
샤오종화는 묘지에서
먼 곳에 살았지만
나보다 10살 아래고
체력이 좋아
자전거 뒤에 나를 태웠어요
길이 험했지만
별 탈 없이 뜻한대로 됐어요
제사를 끝내고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오래 전에 내가 묵었던
굴의 사진도 있었어요
당시의 모든 걸
상세하게 담아두고 싶었어요
가슴 아팠지만
오랜 숙원을 풀고
란저우로 돌아가게 됐어요
우린 30년만에 제사를 올렸지만
모든 가족들이
다 그렇진 못 했어요
우리 뿐일지도 몰랐어요
돌로 둘러싸인 무덤도 있었어요
가족들이 찾아 왔지만
유해를 옮기지 못한 것 같았어요
숱한 사람들이 애통하게
같은 길을 오갔을 거예요
나는 남편의 무덤을 못 찾았어요
고인을 찾아왔는데
제대로 매장 안 된
유해들도 있었어요
무덤들 중엔
유골이 드러난 곳이 있었어요
입을 벌린 해골들이
모래에 반쯤 묻혀 있었어요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어요
억울하게 죽어
고이 잠들 수 없다고
1978년의 11기 3중전회 이후
55호 문건으로
대다수 우파분자들이
복권됐고
우파라는 낙인에서 벗어났어요
공식 통계에 따르면
55만 2,827명의
우파분자가 복권됐고
이 숫자는
우파로 낙인 찍힌 이들의
99.98%예요
96명만 복권 안 됐어요
"좌파의 화"란 책에 그렇게 나와요
현재는 대여섯 명만
남았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96명예요
다이후앙이 쓴 "구사일생"에도
96명으로 나와요
하지만 기록된 것보다
규모가 훨씬 광범위했어요
아무튼 기록된 숫자의
99.98%가 복권됐어요
나머지 0.02%
그러니까 이 96명만
실제 남았는데
반우파투쟁은
철저히 부정되지 않았어요
철저히 부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55여만명이란 게
기록된 숫자일 뿐예요
55여만 외에
기록 안 된 게 허다해요
예를 들어 대학생들은
냉혹하게 처리됐어요
란저우 대학의 많은 학생들을
우파라며 노동개조 보냈고
살아서 돌아오지 못 한
사람도 있었어요
우리 가족만
박해 받은 게 아니라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겪었고
그 사실을 써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1989년 은퇴한 뒤
책을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많이들 말렸고
여동생들까지 그랬어요
"왜 쓰느냐?" 했어요
"써봐야 발표도 못 할텐데
왜 쓰느냐?"고
친구들은 이런 걱정도 했어요
기억을 되살리는 게
너무 가슴 아플 거라고
왜 그 쓰라린 기억을
들추려는지
이해를 못 했어요
"왜 들추려느냐?
한 번으로
족하지 않느냐?"면서
바로 그렇게 아픈 경험이었기에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 했어요
내가 직접 겪은 사실들이라
쓸 이유가 충분하다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나 자신의 이야기고
나보다 누가 더 잘 알겠어요?
내가 안 쓰면 누가 쓰겠어요?
전화 받아야겠네
여보세요?
네, 그래요
아니, 못 들었어요
그래요
그래요
다른 생존자
그래요
그래요, 남편과 같은
농장에 있었어요
74살쯤 돼요
나보다 손위예요
아들이 둘인데
큰애는 2003년에 죽었어요
지금은 작은애 뿐예요
그럼 복권됐어요?
우파였어요?
아니...
그랬어요?
나중에 복권됐어요?
문화혁명 땐 괜찮았군요
이름과 전화번호를 말해줘요
펜 가져올게요
됐어요
'정확하다'의 '증'?
샤오증샹?
네, 네, 네
전화 고마워요
안녕히 계세요
쿤밍의 또다른 생존자에게서
온 전화예요
이 영화를 혁명기를 살아간
혁명가와 혁명의 피해자
모두에게 바칩니다
감독: 왕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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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oogun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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